115page

151 해제 아래 작은 장터에서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각 방향에서 조직적으로 만세시위를 진행하였다. 양림동 쪽에서는 송흥진을 중심으로 개신교 신자들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을 따라 시위행진하였으며, 북문 쪽에서는 광주농업학교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지산면 쪽에서는 범윤두 ·이주상(李周祥) 등이 일곡·생용 일대에서 농민들을 동원하여 시위행진에 합류하였다. 만세시위는 오후 5시경까지도 농업학교·숭일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계속되었다. 당시 시위대 행렬에는 상인들은 물론 친일 행각을 하던 한인들까지 가세하였다. 시위대가 우편국 앞으로 행진을 계속하자, 일제 기마 헌병대와 소방대·재향군인회까지 강제 진압에 나서 100여 명을 체포하였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4월 25일에는 숭일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수백명의 시민들이 동조하였다. 이에 일제경찰은 기마부대를 출동시켜 총칼을 휘두르는 등 강제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20여 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광주에서는 수피아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두드러졌다. 179 1919년 2월 중순경 김마리아(1910년경 수피아여학교 교사)가 수피아여학교에 들러 당시 교사로 있던 언니 김함나에게 「2·8독립선언서」를 전해주었다. 교사 박애순은 파리강화회의의 상황과 『매일신보』에 실린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를 읽어주고,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학생들에게 역설하였다. 3월 6일 밤 남궁혁 목사의 집에 12명이 모여 광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는데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과 진신애가 참여하였고, 박애순이 수피아여학교 학생 동원과 「독립선언서」 배포를 책임 맡았다. 수피아 여학생들은 기숙사 상급생들인 박영자 ·양태원·최경애·홍순남 등이 중심이 되어 기숙사 지하실에서 밤 12시가 넘은 후 태극기를 만들었는데 태극기의 재료는 고종황제 인산날 입었던 치마를 뜯어 한 사람이 10개씩 만들었다. 3월 10일 광주의 작은 장날에 교사 박애순은 박영자 ·홍순남에게 「독립선언서」 50부씩을 나누어 주고 오후 2시까지 부동교 밑 큰 시장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 곳에서 오후 3시 30분에 일반 시민, 숭일학교·농업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하였다. 저마다 가슴에 태극기를 품은 수피아 여학생들이 양림동 쪽에서 광주천변으로 내려와 장날이라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만세를 부르자고 하였다. 시민·학생 등 179 광주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 『수피아 백년사 : 1908~2008』, 광주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 2008, 248~2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