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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윤형숙(尹亨淑)·임진실(林眞實)·조옥희(曺玉姬)·최수향(崔秀香)·하영자(河永子), 그리고 간호사 김안순(金安順)이다. (1) 광주(光州) 광주에서의 3·1운동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178 1919년 2월경 동경유학생 정광호(鄭光好)가 ‘조선청년독립단’ 명의의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광주에 들어왔다. 정광호는 서울 유학 중이던 김범수(金範洙, 경성의전 재학)·박일구(朴一求)·최정두(崔正斗) 등과 만나 만세시위를 논의하였다. 정광호는 2월 중순경 광주에 와 정상호를 비롯해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을 만나 만세시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뜻을 같이하였다. 이들은 먼저 거사를 위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2월 하순경 서울에서 김범수 등이 함께 거사하자고 제안해 왔다. 이에 정광호 등은 「독립선언서」를 가마니에 담아 광주로 돌아와 최한영(광주농업학교 재학) 집에 숨겨 두었다. 같은 시기, 이들과 교유하였던 김필수 목사와 개신교신자 김철(金鐵, 일명 김복현)·최흥종(崔興琮) 등이 서울로 올라가 김범수 등을 만나 운동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서울만세시위에 참가하였던 최흥종이 시위 도중 일제경찰에 붙잡히자 김철 ·최정두 등은 3월 5일 광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양림동 남궁혁(南宮赫)의 집에 모인 강석봉(姜錫峰)·김강(金剛)·최병준(崔炳俊)·김용규(金容圭) ·김태열(金泰烈)·서정희(徐廷禧)·최영균(崔瑛均)·최한영(崔漢泳)·한길상(韓吉祥)·홍 승애(洪承愛, 수피아여학교 교사)·황상호(黃尙鎬) 등은 3월 8일 광주 큰장날에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독립선언서」·태극기 준비는 김용규·범윤두(范潤斗)·최정두·최한영·한길상 등이 맡고, 일반시민 동원은 서정희가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개신교신자 동원은 김강, 수피아여학교 학생 동원은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朴愛順)과 홍승애, 숭일학교 학생 동원은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崔丙浚), 그 외학교의 학생 동원은 김용규·김태열·최영균 등이, 준비자금은 이기호(李基浩)가 각각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준비하기에는 기간이 너무 짧아 거사일을 3월 10일 작은 장날로 연기하였다 3월 10일 오후 2시경 김강·김복현 등이 「독립선언서」 배포를 시작으로 부동교 17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555~562쪽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앞의 책,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85~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