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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해제 모두 빼앗고 우리들의 부모형제를 학살한 강도이다. 도리어 삼천리의 주인이 되는 우리들을 불법이라고 하니 이것은 법적인 판결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일본인 검사는 크게 노하여 칼을 빼들고 학생들의 왼쪽 귀를 잘라버리고 모든 학생들의 옷을 벗기고 알몸으로 세워놓고 조롱까지 하였다. 학생 임영신은 손을 들어 일본 관리를 때리며 ‘야만인’이라고 말했다. 일본인 검사가 또 신문하기를, ‘너희 조선은 군함도 군대도 대포도 철도도 없다. 완전한 독립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하자 학생이 대답하기를 ‘이후에는 군함, 대포, 군대, 철도 등의 물건들은 모두 머지 않아 없어질 것이다. 너희들이 이런 따위의 것을 묻는 것을 보니 그 어리석음을 가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검사가 다시, ‘누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쳤느냐?’라고 묻자 학생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전국이 정의를 떨치고 일어나 모두가 함께 만세를 부른 것이다. 무슨 부탁을 받았다는 것인가. 너희들은 참으로 세계적인 관점에 어두운 섬 사람이구나’라고 대답하였다. 일본 관리들은 이렇게 아픈 곳을 찔리자 심문을 멈추고 도로 가두어버렸다. 175 박순애는 정신여학교 학생으로 1919년 12월 28·30일에 기전여학교에서 1920년 1월 5일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계획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 2월 20일 광주지방법원전주지청에서 소위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령’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공소하였으나 1920년 4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당하였다. 176 본적은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내리(知道面 幸州內里), 주소는 경기도 경성부 연지동 정신여학교 기숙사였다. 11) 전라남도 전남 지역의 3·1운동은 평안도나 경기도 등에 비해 그리 격렬한 양상을 띠지는 않았다. 그것은 진남 지역의 천도교나 개신교의 교세가 상대적으로 미약하였으며, 유생층도 한말 의병봉기로 인해 큰 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운동을 주도할 만한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따라서 청년층이나 보통학교 학생층이 직접 만세운동의 주도층으로 나선 경우가 많았다. 177 이 자료총서에 수록한, 전라남도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은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朴愛順)·진신애(陳信愛), 수피아여학교 학생 김덕순(金德順)·박우말례(朴又末禮)· 175 박은식, 김도형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 322쪽. 176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20.2.25)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20.4.10) 177 박찬승, 「전남지방의 3·1운동」, 『전라남도지』 8,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1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