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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해산하였다. 당시 전주교 부근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며 이명수(李明洙)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3월 17일에는 초포면 송전리 들판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21일에는 봉동면 장기리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23일에는 전주 장날을 이용해 수천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군청·경찰서·재판소가 위치한 큰 거리를 지나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일제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으며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24일에는 삼례면 삼례 장날에 수백 명의 군중이 만세행진을 전개하고 삼례역을 습격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전주에서 활동하였던 기전여학교 김공순 166 ·김나현 167 ·김신희 168 ·김인애 169 ·최요한나 170 ·함연춘 171 의 만세운동을 『기전80년사』 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919년 3월 13일 기전여학교 학생들은 ‘남문의 인경소리’가 울리기를 남문 밖 최요한나 집(현 전동 295번지) 안방에서 기다렸다. 졸업반(3학년) 김신희의 어머니와 다른 학생들의 어머니는 자그마한 장바구니를 들고 남문 밖 길가를 왕래하면서 신흥학교 학생들과 신간회원들이 오는가를 살폈다. 곧 남문 밖에서 신흥학교 학생들과 만나 합세하였다. 전주 장날이었기에 많은 장꾼들이 몰려들었다. 하얀 치마저고리에 머리에는 하얀 끈을 동여맨 166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6.30)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9.3)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사단법인 애국동 지회, 1956, 182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496·499쪽 ; 『독립운동사』 9, 1979, 281쪽 ; 『독립운동사』 10, 1979, 841쪽. 167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6.30)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9.3) ;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Ⅰ, 1966, 661쪽 ; 문 일민, 앞의 책, 1956, 182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495∼498쪽 ; 『독립운동사』9, 1979, 280∼281쪽 ; 『독립운동사』 10, 1979, 841쪽. 168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6.30)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9.3) ; 『신한민보』 1919.6.7, 「세계 자유사상에 처음 보는 십만명 애국 여자의 대활동」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496∼499쪽 ; 『독립운동사』 9, 1979, 281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4, 1994, 237쪽. 169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6.30)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9.3 ) ; 문일민, 앞의 책, 1956 ; 단국대학교 부설 동 양학연구소, 『박은식 전서』 상, 단국대학교출판부, 1975, 629∼630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499쪽 ; 『독립운동사』 9, 1979, 281쪽. 김인애는 옥고를 치른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나라[奈浪]고등사범학교를 마치고 서울 정신여학교 에서 교사로 활동하다가 기전여학교 성경 담당교사로 부임하였다.(기전80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82, 201쪽) 170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6.30)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9.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495-496·499쪽. 최요한나(崔堯漢羅)는 최요한[崔約翰], 최요한나(崔約漢那) 등 한자 표기가 여러 가지이다.(기전80년 사편찬위원회,『기전80년사』, 전주기전여자중학교·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기전여자전문대학, 1982, 196~197쪽.) 171 「판결문」(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1919.6.30)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9.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9, 496쪽 ; 『독립운동사』 9, 1979, 2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