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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해제 선전·선동 작업으로 통영 지역의 반일의식이 한층 고양되었다. 3월에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고조된 지역주민의 분위기는 4월 2일 만세운동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3월 18일 서당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한 박상건과 강윤조·고채주 등이 이 날의 만세운동을 다시 주동하였다. 만세운동은 오후 3시 30분경 부도정 시장에 수천여 명의 군중이 집결하면서 시작되었다. 만세운동의 주동자들은 서당학생, 어민, 제조업자, 해외독립운동 출신자 등이었다. 이 날의 시위에는 시장상인들이 동조하여 철시하였고, 예기조합의 기생들은 금비녀·금팔찌를 팔아 소복차림으로 시위대열에 함께 하였다. 시위군중 수는 4~5,000명을 헤아렸는데 빈민들이 다수를 이룰 만큼 기층민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통영에서 활동하였던 이소선과 정막래는 통영군의 기생으로 1919년 4월 2일 오전 10시경 통영군 통영면 길야정(吉野町) 기생조합소에서 기생 5명과 함께 기생단(妓生團)을 조직하였다. 정막래는 가지고 있던 금붙이를 팔아서 상복과 짚신을 구입하고 다른 기생들에게 나누어 준 후 상복 차림으로 기생조합소를 출발하여 4월 2일 오후 3시경 통영면 부도정(敷島町) 시장에서 만세운동의 선두에 서서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소선과 정막래는 바로 검거되어 군중을 선동한 죄로 1919년 4월 18일 부산지방법원통영지청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았다. 159 마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19년 10월 18일 출옥하였다. 160 기생들은 지역의 만세운동에 동참하면서 독자적인 또는 주도적이며 상징적인 만세운동을 펼쳐나갔다. 기생들이 수천여 명의 만세운동 물결 속에서 선봉에 섰던 것은 기생들만의 민족적 정서와 함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 등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61 3·1운동을 전후하여 기생 중에는 애국기생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기생을 사상(思想)기생이라 불렀다. 31운동 당시의 치안 책임자 치바[千葉了]는 3·1운동 이후 기생들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919년 9월(3·1운동이 난 해) 우리들이 처음으로 부임했을 때의 서울 화류계는 술이나 마시고 춤이나 추는 그런 놀아나기만 하는 눈치는 조금도 볼 수 없었다. 약 800명의 이 기생들은 화류계 여자라기보다 독립투사였다. 이 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는 불꽃이 159 이동근, 「1910년대 ‘기생’의 존재양상과 3·1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4, 2013, 157~158쪽. 160 「판결문」(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 1919.4.18)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매일신보』 1919.4.24, 「통영소요기생, 징역 6개월에, 부산의 소요공판」 ; 『신한민보』 1919.7.1, 「막래, 소선은 나라를 위하여 충의를 다하다가 징역」. 161 이동근, 앞의 논문, 2013, 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