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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해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낙평동 본가로 돌아왔다.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한 인물은 김세영 외에 구세군 정위(正尉) 권태원(權泰源), 병곡면 송천동 장로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 남녀명(南汝明), 남효직(南孝直), 권상호(權相鎬) 등도 있었다. 이들이 소식을 가져오면서 영덕의 3·1운동은 추진되었다. 3월 18일에 영해면의 시장과 주재소에서 시작한 독립만세운동은 주재소, 보통학교, 소학교, 우편소,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일제경찰들과 순사보들을 응징하였으며, 영해를 출발하여 병곡으로 가서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영덕면에서는 강우근(姜佑根)·이승구(李承玖)의 주도 아래 영덕면과 남정면,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의 개신교신자들 중심으로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9일에는 창수면에서 이종구(李鍾龜) 등이 주도하여 창수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지품면에서는 주명우(朱明宇)의 주도 하에 황장동(黃腸洞)의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1일에는 지품면에서 문의향(文義鄕)의 주도 아래 문씨들과 마을민들이 신안동(新安洞) 일대를 행진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4일에는 남정면에서 박명방(朴命方)의 주도 아래 개신교신자들과 장사동 마을청년들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영덕에서 활동하였던 신분금·윤악이는 남편들이 독립운동을 계획하다가 검거된 후 함께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24일 영덕군 지품면 원전동 시장에서 함께 한국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영덕지청에서 신분금은 징역 6월, 155 윤악이는 징역 8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56 9) 경상남도 경남의 3·1운동은 1919년 3월 3일에 시작하여 4월 말 일단락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3월 11일 부산의 개신교계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위를 시발점으로 3월 중순 이후 경남의 3·1운동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3월 13일 동래·영산·밀양, 14일 의령·창녕·통영, 17일 함안, 18일 진주·통영·하동·합천 등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김해·양산·창원·함양에서는 155 「판결문」(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 1919.4.16)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156 「판결문」(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 1919.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