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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은 2월 27일 김홍규에게 활자판을 가져다가 인쇄를 지시하였다. 김홍규는 신영구를 시켜 보 성사에서 오후 5시부터 11시경까지 독립선언서 21,000매를 인쇄하여 이종일에게 교부하였 다. 이 독립선언서는 2월 28일에 이종일이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에게 전달되어 전국에 배부 되고, 학생들을 통하여 3월 1일에 서울 시내에 배포되었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자들은 명월관 지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학생과 일반 시민들은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 민족대표자들은 일경에 체포되었 으나, 학생과 일반 시민은 파고다 공원을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해가 질 무렵까지 서울 시내를 활보하였다. 또한 지방에서도 3월 1일에 평양, 진남포, 의주, 원산, 선천, 안주 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1운동은 사전에 종교계 계통을 연락이 있었던 지역에서는 초기에 독립만세운동이 전개 되었고, 독립선언서가 전달되거나 고종 국장을 참례한 인사들이 서울의 3·1운동을 목격하 고 귀향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독립만세운동은 초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중순 이후에는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3월 25일 이후 10일간 전국 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비폭력적인 ‘대한독립만세’만을 외치는 방법에서 일제의 치안기관인 경찰주재소와 헌병주재소, 행정기관인 면사무소와 군청, 교육기관인 학교 시설 에 대한 폭력적 공격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경찰·헌병은 물론이고 친일적인 말단 행정관 리인 면장과 면서기에 대한 응징이 이루어졌으며, 일본인들의 퇴거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력적 진압과 사법적 탄압 및 행정적 회유와 압박으로 인하여 4월 10일 이후에 약화 되었다. 또한 일제의 헌병과 보조원 및 6개 대대의 증파는 3·1운동이 급속히 약화시키는 요 인의 하나였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각 지방별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고 그에 따라 독 립만세운동에 있어 지역적 양상이 다르게 나타났다. 서울의 3·1운동은 3월 1일 독립선언과 수만 명의 독립만세운동에 이어 3월 5일 학생 중심 의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이 있은 이후 일제의 탄압과 무력 시위로 독립만세운동은 주춤하였 다. 그러나 3월 하순에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22일의 노동자대회를 계 기로 3월 23일과 26~27일에 종로를 중심으로 시내 각처에 소규모 단위의 독립만세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3월 23일·26일에는 전차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4월 중에는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