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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총 설 Ⅴ . 맺음말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직접무단통치하에서 국가와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회 복하려는 민족독립운동이었다. 국내외의 정세 변화와 국내 분위기에서 고종의 국장은 3·1 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뇌관 역할을 하였다. 천도교계 손병희·최린·권동진·오세창이 독 립운동계획을 1월 하순경부터 논의하며 3·1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실행을 맡은 최린이 최 남선과 접촉하고 이어 기독교 장로교 이승훈이 가세하면서 종교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추 진되었다. 2월 11일 이승훈이 상경하여 송진우와 만나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첫 만남이 이 루어졌고, 여기서 독립운동에 기독교측의 참가와 동지 규합이 결정되었다. 이승훈은 선천과 평양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2월 17일 재상경하여 2월 20일부터 감리교 계통 인사와 접촉하며 기독교계의 동지 규합을 확대하여 나갔다. 2월 21일 이승훈은 최남선과 처음으로 만나 최린 의 집에 갔을 때 최린은 이승훈에게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동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이승훈은 독립운동비 5,000원을 요구하여 2월 22일 손병희의 지시로 최린을 통하여 수령하였다. 독 립운동비를 수령한 이승훈이 함태영과 함께 최린를 찾아갔을 때 최린은 독립청원서 제출이 아닌 독립선언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후 두 종교계의 독립운동계획은 최린·이승훈·함태 영 3명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기독교계가 숙의를 거쳐 2월 24일 이승훈·함태영이 최린에 게 천도교측의 주장을 수용한다는 통보를 함으로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동이 성립되었다. 한 편 박희도·이갑성은 강기덕·김원벽 등을 통하여 학생 세력을 규합하여 종교계의 독립운동 계획에 합류시켰다. 민족대표자 선정으로 천도교 측은 2월 25~27일 경성에 모인 인사들을 중심으로 15명을 선정하고, 기독교 측은 2월 26일에 한강 인도교 위에서 대략 선정하고 2월 27일 이필주 집 에서 독립 서류 초안을 보고 16명을 선정하였다. 불교계는 한용운이 2월 24~27일에 최린의 독립운동계획을 듣고서 박용성의 찬성을 얻어 2명이 대표자가 되었다. 이들 대표자들은 2월 27일에 최린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및 기타 서류의 별지에 서명 날인하였다. 최남선은 2월 10일경 선언서 기초를 끝내고 15일경 최린에게 교부하였고, 기타 독립 관련 서류는 2월 25일에 최린에게 교부하여 기독교 측에 열람시키고 2월 26일에는 손병희 등에게 열람하여 최종 확정되었다. 그는 신문관에서 활자판을 짜서 최린 집으로 전달하고, 이종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