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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총 설 대통령 청원서, 파리강화회의의 열국위원 의견서 초안을 최린에게 제출하고, 최린이 2월 26 일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에게 보여 동의를 얻어 3·1운동 문서들이 최종 완성되었다. 천도교 측은 손병희·권동진·오세창이 협의한 다음 2월 25~27일에 임예환(林禮煥)·나 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黙 )·권병덕(權秉悳)·나용환 (羅龍煥)·김완규(金完圭)·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 10명과 이종일의 권유로 오세창 (吳世昌)이 대표자로 선정되어 최린을 포함한 15명을 확정하였다. 최린·오세창·임예환· 권병덕·나인협·홍기조·김완규·나용환·홍병기·박준승·양한묵 11명은 2월 27일 김상 규(金相奎) 집에서 선언서 관련 서류의 별도 지면에 날인하고, 손병희는 타인을 시켜 날인하 였다. 기독교측은 2월 26일 한강 인도교에서 이승훈·박희도·오화영·함태영·안세환· 이갑성·최성모(崔聖模)·이필주(李弼柱) 8명을 선정하고, 일제에 서류 제출을 위해 안세환 을 동경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2월 27일 이필주 집에서 이승훈·박희도·이갑성·오화영· 최성모·이필주·함태영·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 10명이 회합하 였다. 함태영이 독립 서류 초안을 회람시키고, 연명 인사로 참석자 중 함태영을 제외한 9명 과 신홍식·양전백·이명룡·길선주·김창준·이필주·정춘수 7명 합계 16명을 대표로 확 정하고 함태영은 연명자가 체포될 경우 그 가족 보호 임무를 맡기로 하여 제외하였다. 그날 밤 함태영은 9명과 이승훈이 받은 유여대·이명룡·김병조·양전백·길선주·신홍식 인장 을 갖고 최린 집에서 별지에 날인하였다. 불교측은 한용운이 2월 24~27일 최린에게 독립운 동계획을 듣고 서류 초안을 보고 찬성하여 2월 27일 백상규의 찬성을 얻은 후 2명을 지면에 날인하였다. 최남선은 신문관 직공을 시켜 독립선언서 활자판을 짜서 최린 집에 가져다 놓았다. 2월 27 일 이종일은 보성사 감독 김홍규(金弘奎)에게 활자판을 가져다 인쇄하게 하였다. 김홍규는 신영구(申永求)를 시켜 오후 5~11시 무렵까지 21,000매를 인쇄하여 2월 28일 이종일에게 교부하였다. 2월 28일 밤 손병희 집에는 양전백·길선주·이명룡·김병조·정춘수·나인협·호기 조·양한묵·백상규 9명을 제외한 대표자와 함태영이 참가하였다. 이 회합에서 3월 1일 학 생 집합을 듣고 분요(紛擾)를 염려하여 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명월관지점으로 변경하고, 3 월 1일 이갑성이 조선총독부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독립선언 장소에서 일동이 포박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