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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군중이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행진하고 이어 면사무소에서 계속 만세를 불렀다. 800여명이 천의로 이동하여 경찰주재소를 공격하고 일경들과 치열한 격투를 벌렸고, 이어 1,000여명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면사무소로 이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13) 서산군 읍내에서는 3월 24일에 김관용(金寬龍)이 오후 7시경 이계성(李啓聖)에게 권유받고 해미 보통학교 졸업생 고별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오늘 밤 고별연회가 끝난 후에 모두 면사무소 와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졸업생 이봉이(李鳳伊) 등 3명과 재학생 장 기남(張基南) 등 3명에게 제안하였다. 이들은 밤 11시경 유세근(柳世根)·김연원(金然源) 등 수십 명과 함께 면사무소와 읍내 우(牛)시장에 가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운산에서는 4월 5일 에 오인탁(吳仁鐸)이 오후 7시경 고산리에서 한오복(韓五福) 등 수명과 뒷산에서, 이봉하(李 奉夏) 등 3명이 황군성(黃君成) 등 용현리 주민 50여 명과 보현산에서 횃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성연에서는 4월 8일에 김옥제(金玉濟)가 밤에 이종옥(李鍾玉) 집에서 남명숙(南 明淑) 등 수명에게 권유하여 갈현리 성왕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음암에서도 같은 날 채돈문(蔡敦默·致雲)이 오후 10시경 이성삼(李聖三) 등 율목리 주민 약 15명과 토성산에서 횃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4) 보령군 보령에서는 3월 10일경부터 4월 10경까지 1개월간에 걸쳐 김사구(金思九)·강영국(姜永 國)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 준비 활동이 있었다. 김사구는 3월 10일경 강영국에게 군내에 독 립운동이 없는 것은 고을의 수치라 말하고 동의를 얻고, 꽃놀이를 구실로 동지를 얻고자 노 력하였다. 그는 3월 17일에 김재두(金在斗)·한기석(韓基錫)·이병철(李秉喆), 25일에 박재 건(朴齊乾), 27일에 임경진(林庚鎭), 30일에 고광춘(高光春)을 방문하여 꽃놀이 잔치 참석을 권유하고 수첩에 서명 날인까지 받았다. 4월 10일에 신태중(申泰重) 집에 김사구·강영국· 이병철·고광춘·박제건·임경진 6명이 모여 식사 후 김사구·강영국은 “보령 군내에서는 이러한 운동에 착수하는 자가 없으니 우리가 주모자가 되어 궐기하자. 우선 보령리 진두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쳐 독립운동을 일으킨 다음에 청죽면 사무소를 습격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