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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총 설 파괴를 주도하여 송기면 등 6명이 탈출하였다. 노형래(盧亨來) 등은 태극기 제작·운반 및 출장소 파괴에 적극 가담하였다. 11) 예산군 고덕에서는 4월 3일에 장문환(張文煥)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날은 대천 (한천)시장 장날로 약 1,000여명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경이 7명을 연행하며 발포하 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장문환(張文煥)은 약 14~5명을 이끌고 순국자 시신을 주재소 앞으로 운구하고 사무실에 들어가 헌병오장 지촌송태랑(志村松太郞)에게 “왜 백성을 죽였는 가? 이를 소생시키지 못하면 우리들도 모두 죽여라”며 항의하고 지촌오장의 가슴을 구타하 였다. 같은 날 신양에서는 성원수(成元修·允京)가 오후 8시 연리 주민 수십 명과 뒷산에 올 라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5월 8일에 헌병보조원 박동진(朴東鎭)이 체포하러 왔 다. 그가 집을 탈출하자, 박동진이 따라와 상의를 잡아서 격투가 벌어졌다. 그는 박동진을 논에 넘어뜨리고 주먹으로 안면과 복부에 상처를 입혔다. 예산에서는 4월 4일에 박대영(朴大永)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4월 4일 오후 2시경 시장에서 2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박대영·최문오(崔文吾) 가 약 50여명의 군중과 독립만세를 불렀고, 2,000여명 군중이 헌병분대로 만세 행진을 하였 다. 헌병 상등병 증목추수(曾木秋秀)는 수차 해산을 종용하다가 박대영을 체포하자, 최문오 가 헌병에게 두 주먹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박대영도 헌병의 곤봉 양끝을 잡고 몸에 깎지 를 끼고 바싹조여 꼼작 못하게 하였다. 결국 헌병은 주먹을 맞고 땅에 쓰러졌다. 대흥에서는 4월 4일에 정인하(鄭寅夏)가 대율리 주민 수십 명과 마을 동쪽 산에서, 대술에서 는 4월 5일에 민제식(閔濟植)이 산정리 주민 30여명과 마을 산에서 횃불독립만세를 불렀다. 12) 당진군 당진에서는 4월 4일에 대호지면과 전의면에 걸쳐 송재만(宋在萬)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송재만·이인정(李寅正)·남성우(南成祐) 등은 사전 계획과 준비를 마치고 4 월 4일 장날에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대호지시장에서 한운석(韓雲石) 등이 애국가 수백 매 를 군중에 배부하고, 송재만·이인정·남계원(南桂元) 등의 독립만세 선창으로 약 400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