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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9) 부여군 부여에 독립선언서는 논산의 김태호가 3월 2일 오후 9시경 부여교구실에 전달하여 도착하 였다. 그는 김종석(金鍾錫) 등에게 선언서 배포를 설명하고, 김종석·황우열(黃宇烈) 등 3명 에게 건넸다. 이들은 협의를 거쳐 조원상(趙元祥)·김덕빈(金德彬) 등과 규암·임천·은산· 석성면 및 읍내 각처에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임천에서는 3월 6일 아침 박용화(朴容和)가 집 에서 박성요(朴性堯) 등 7명과 협의한 후 오전 7시경 읍내에 가서 군중들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구교리 면사무소·보통학교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박용화·최용철 등 천도 교도 10여명은 헌병대 임천출장소로 가서 독립 승인을 요구하였다. 이는 3·1운동 때 일제기 관에 독립 승인을 요구한 최초의 사례이다. 10) 서천군 화양에서는 3월 초순에 조남명(趙南明)이 화양·기산면을 순회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준비 하였다. 그는 3월 4일 유재경(劉載璟)에게 독립선언서를 구해 보고, 3월 6일에 구동리 이근 호(李根浩) 집에서 이근호·한백희(韓伯凞)·최경진(崔敬鎭)에게 선언서를 보이고 “학생들 은 국사(國事)를 위하여 지금 군산경찰서에 유치되어 조사를 받고 있으니 우리도 독립운동을 하자”고 하고, 3월 7일에는 이경욱(李敬旭) 집에서 이경욱·정희석(鄭凞錫)에게 독립만세를 제의하였다. 또한 3월 8일에 서천으로 압송 도중에도 서천면 섬산리의 시장 군중들에게 독 립만세를 외쳤다. 마장에서는 3월 29일에 송기면(宋箕勉)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3월 23~27일에 태극기 200기를 제작하고, 3월 28일에 유성렬(劉性烈)·이근호(李根浩)·임학 규(林學圭)를 만나 내일 장날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3월 29일 오후 1시경 신장리시장에서 송기면·유성열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송여직(宋汝直) 등이 독립 연설을 하고, 군중들은 독 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이한규(李翰圭) 등 순사보는 송기면·유성열을 구인하고 송여직 등도 연행하였다. 그러자 이근호·나상준(羅相俊)이 군중과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출장소로 이동하였다. 일경들이 이들도 구인하자, 2,000여명 군중들은 구금 인사 탈출을 위 해 출장소를 공격하였다. 고시상(高時相)·양재흥(梁在興) 등이 선두에서 창문·유리창을 부 수고, 이승달(李承達)이 구금 인사 탈출까지 해산하지 말도록 독려하고, 정일창(鄭日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