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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명을 들은 후 북을 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면사무소에서 이문재(李文載) 등 군 중들은 돌·곤봉 등으로 시설물·각종 기물·문서들을 파손하였다. 구항에서는 4월 7일에 이길성(李吉性)이 ‘대한독립만세’ 깃발을 만들고 독립만세를 결심하 였다. 그는 황문수(黃文秀) 등 8명과 월산 남쪽에 올라 ‘대한독립만세’ 깃발을 세우고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제의 총격으로 일단 하산하였다가 이길성·황문수·이유홍 등 은 다시 월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7) 청양군 정산에서는 4월 5일에 홍범섭(洪梵燮)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독립만세 운동이 확산될 때 상경하여 종로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백곡리로 귀가하였다. 그는 임 의재(任毅宰) 등 4명과 선언서를 읽고 독립만세를 결의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들은 4월 5일 정산 장날 오후 3시경 군중에게 태극기를 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100여명과 시장 일 대를 활보하였다. 이날 권흥규(權興圭)가 순국하여 이튿날까지 독립만세운동이 이어졌다. 화성에서는 4월 5~6일과 8일에 독립만세운동을 불렀고 독립만세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응 징하였다. 박공삼(朴公三)·조남희(趙南熙)는 4월 8일에 산정리 주민 20여명과 정자동에서 태극기 2기를 세우고 큰 종을 울리며 한국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이튿날에도 오전 10 시 면사무소 공사장 인부 20여명에게 “조선은 이미 독립하였으므로 증축 공사를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며 공사장을 파괴하였다. 강학남(姜學南)은 4월 8일 오후 10시경 구장 이병규 (李炳圭)에게 “화성면 농암·산정리에서는 한국을 독립시키기 위해 열렬하게 대한독립만세 를 고창하고 있는데, 왜 우리 마을에서는 독립운동을 안 하는가? 나와 너하고 대한독립만세 를 주창하자”고 권유하였다. 김학성(金學成)이 “너 혼자 불러라”하고, 이병규도 “그런 짓 하 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강학남은 양인을 구타하고 옷을 찢었다. 비봉에서는 4월 8일 밤에 유남식(劉南植)이 유천식(兪天植)과 강정리 주민 수십 명과 뒷산 에서 횃불을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튿날에는 김현규(金顯奎)가 이상유(李象裕) 집에 주민을 모아 수명과 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같은 날 장평에서 김사길(金士 吉)이 오후 8시경 낙지리 동남쪽 약 400m지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박용만(朴容萬) 등에게 만세를 권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