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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하여 청주 문의·이원면과 보은읍 등지에 배포하게 하였다. 나머지 150매는 50매씩 봉투에 넣어 청주 강내면 조동식 등에게 보냈다. 남면·동면·전동·서면에서는 3월 하순에 중부지방의 대표적 독립만세운동의 한 형태인 횃불독립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남면에서는 3월 23일부터 시작하여 3월 31일 과 4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3월 31일에 임헌상(林憲祥)이 오후 8시경 방축리 주민 약 30명과 황우산에서, 박원칠(朴元七)이 같은 시간에 보통리 주민 약 10명과 마을 뒷산에 서, 김봉식(金鳳植) 등 4명은 이덕민(李德敏) 집에 모여 만세를 부르며 임덕화(林德化)를 앞 세워 양화리 주민 100여명과 아울산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1일에는 임희 수(林喜洙) 등 3명이 오후 9시경 송담리 주민 약 30명과 서운산에서, 유시풍(柳時豊)이 야간 에 갈운리 주민 약 150명과 황우산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면(東面)에서는 3월 28일 연기 군수가 면사무소에서 회유 연설을 하는데, 장홍진(張弘鎭)·장기민(張基民) 등이 “한국 민족으로 독립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반박하였다. 이어 귀가하여 송룡리 주민 10명과 마을 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전동에서는 3월 29일 권혁기 (權赫基)가 청송리 주민 약 20명이 내동산에서, 서면에서는 3월 30일 유진광(兪鎭廣)이 다른 마을에 호응하여 기룡리 주민과 뒷산에서 횃불을 놓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금남에서는 4월 2일에 임헌규(林憲奎) 등이 대평리시장 장날 수백 명의 군중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행진을 하였다. 5) 아산군 신창에서는 4월 2일에 이덕균(李德均)·박진화(朴秦和)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이덕균 등 주도인사 15명은 오후 8시경 읍내 주민 약 200명과 학성산에 올라 횃불 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덕균이 관청을 쳐부수자고 제안하고 박진화와 함께 군중들 을 이끌고 하산하였다. 먼저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정윤홍 등이 투석하여 문 2개를 파괴하고, 헌병주재소에서 문등·유리에 투석하여 깨뜨리고, 신창 공립보통학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 하였다. 교장 종방교(宗方喬)의 제지로 시비가 벌어져 박진화가 투석을 시작으로 유리창 272 장·문 4개를 파괴하였다. 특히 강달성(姜達成·雲敎)은 학성산에서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 소·헌병주재소·보통학교에서 투석 공격을 주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