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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순구는 쇠스랑으로 유치장 벽을 부수고, 김상철(金相喆)도 유치장 벽을 수차 걷어찼다. 유중 권이 총검에 찔려 빈사 상태에 빠지자, 유중무는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서 치료를 요구하였 다. 이후 군중이 주재소로 계속 이동하여 약 3,000여명에 이르렀다. 헌병 5명은 유리창이 깨 지는 등 주재소가 파괴되자, 사무실 입구 왼쪽에서 병렬로 집합하여 경계를 하였다. 군중들 은 헌병들의 탄약함을 잡아당기고, “소장을 죽이라”고 외치며 소장을 끌어내려고 할 때 권총 몇 발이 발사되었다. 헌병의 두번째 총격에 일부는 피신하고, 일부는 주재소의 다른 쪽으로 이동하였다. 군중이 일시 피신하자, 헌병들은 순국자 시신을 주재소 밖으로 내던졌다. 이에 격노한 유중무는 두루마기 끈을 풀어 헌병 목을 졸라매려 하고, 형의 시신을 사무실로 옮기 려고 하였다. 보조원 맹성호(孟星鎬)가 제지하자, 유중무는 “너는 보조원을 몇 십년 하겠느 냐?”며 윽박질렀다. 유관순은 시장에서 주재소로 가서야 부친의 죽음을 알고 “제 나라를 되 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며 주재소 장을 잡고 항의하였다. 김용이(金用伊)는 헌병에게 투석하고 총기를 빼앗으려고 하고, 보조 원 정수영(鄭壽永)에게 “조선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며 호통 을 쳤다. 정수영이 “부상자에게 더운 물을 주라”며 주전자를 주자, “이 따위 물을 마실 수 있 느냐?”며 정수영 가슴에 던졌다. 조인원은 좌흉부를 맞고 총검에 왼팔이 찔렸으나 순국자 시 신을 사무실 안으로 운구하고 상의를 벗고 주재소장과 헌병 총을 낚아채려고 하였다. 조병호 도 상등병 진상부(溱相部)를 구타하였다. 일제는 천안 철도엄호대장 갑(甲)대위 이하 6명을 자동차로 급파하여 오후 4시경 병천에 도착하였다. 헌병과 보병들이 실탄 14발을 발사하여 군중들을 제압하였으나 일부는 시장 주변에서, 일부는 주재소를 공격할 태세로 동태를 주시 하였다. 이 독립운동으로 19명이 순국하고 4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4명이 체포당하였다. 3) 공주군 신상(유구)에서는 3월 14일에 황병주(黃秉周)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매 일신보」를 통해 손병희(孫秉熙)가 체포된 사실을 알고 독립만세를 결심하였다. 3월 14일 오후 4시경 장날 시장에서 30여명에게 모자를 벗어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군중들 이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우(牛)시장으로 행진하였다. 고산전우위문(高山傳右衛門)순 사 일행이 수차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군중들은 오히려 약 500여명으로 늘었다. 고산순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