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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총 설 천안에서는 3월 29일에 이문현(李文鉉)·허병(許炳)이 오후 2시경 시장 군중 속에서 두 손 을 높이 들어 독립만세를 부르고, 인시봉(印時鳳)도 만세를 권유하며 시장을 활보하였다. 최 오득(崔五得)은 3~40명에게 ‘대한국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중들도 만세를 외쳤다. 병천에서는 3·1운동사에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이 4월 1일 유관순(柳寬順) 등 주도로 전 개되었다. 이 독립운동은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 인사들과 조인원(趙仁元)·유관 순 인사들이 각자 준비하여 아우내장터에서 있었다. 홍일선·김교선은 병천 장날 독립만세 를 합의하고, 3월 29일 한동규(韓東圭)·이순구(李旬求)·이백하(李栢夏)에게 권유하였다. 한편 조인원 등은 유관순이 3월 13일 귀향하며 준비하였다. 유관순이 부친 유중권(柳重權)· 숙부 유중무(柳重武)·조인원 등에게 서울 3·1운동을 설명하여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독립 만세를 결정하였다. 또 시장의 천안쪽은 조병호(趙炳鎬), 수신면은 조만형(趙萬衡), 충북 진 천은 박봉래(朴鳳來)가 맡아 권유하고,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31일 밤 자정 병 천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수신면 산마루·진천 고개마루에 횃불을 올렸다. 4월 1일 홍 일선·김교선 등이 시장 입구에서 장터로 오는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고, 귀가하는 주민들에게는 되돌아가 참여하도록 하였다. 오후 1시경 ‘대한독립’의 큰 깃발을 세우고 태극 기를 들고 조인원이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유중 권·유중무·조병호 등도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중들도 독립만세를 고창하 였다. 이때 홍일선·김교선 등이 가세하고, 백정운(白正云)은 김상훈(金相勳)이 준 태극기 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5~600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은 시장 일대를 활보하였다. 시장에서 약 50보 정도 떨어진 헌병주재소 소산(小山)소장 등 5명은 만 세 소리를 듣고 출동하였다. 헌병의 강력한 해산 요구에 군중들은 큰소리로 만세를 부르며 불응하였다. 이에 헌병들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헌병이 조준할 때, 유관순은 충 돌을 방지하고 군중을 보호하려고 헌병에게 달려들었다. 헌병의 발포로 군중들이 흩어지자, 헌병들은 사격을 일시 중단하였다. 이어 부상자 응급조치를 한 약 40여명은 순국자 시신을 주재소로 운구하고 격렬히 항의하였다. 김교선·한동규 등이 시장에서 약 100여명을 이끌 고 주재소로 갔다. 김교선은 사무실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한동 규는 보조원에게 태극기를 다시 빼앗아 흔들며 이백하와 앞장서 소장에게 사망자 조치를 요 구하며 “우리도 함께 죽여 달라”고 윽박질렀다. 이어 이백하가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고,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