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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를 고창하였다. 수한에서는 4월 12일 최용문(崔容門)·안만순(安萬淳)·송항빈(宋恒彬)이 독 립만세를 약속하고 묘서리 주민들에게 권유하여 오후 8시경 농암산에 60여명이 모였다. 최 용문이 독립 연설을 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여 주민들도 독립만세를 열창하였다. 8) 옥천군 이원에서는 충북지방의 대표적인 3·1운동이 3월 27일에 육창주(陸昌柱)·허상기(許相基) 등 주도로 전개되었다. 육창주·허상구(許相球)·육창문(陸昌文)은 고종 국장 참례 때 서울 3·1운동을 목격하고 파리강화회의 소식도 들어 독립운동 토론까지 하였다. 허상구는 10일 후 귀가하여 부친 허훈(許訓)과 형 허상기에게 서울 3·1운동 상황과 국내외 정세 등을 이야 기하여 독립운동에 찬성을 얻었다. 육창주는 3월 13일경 귀가하여 허상기와 독립운동을 협 의하였다. 3월 14·5일경 육창문 사랑채에서 육창문·육창주·허상구·허상기·허훈 등이 모여 “3월 27일 이원시장 장날에 시장에서 만세를 고창하고 행진하자. 이를 따르지 않는 자 는 강제로 참가시키자”고 합의하였다. 또한 “당일에는 태극기 3기를 만들어 육창주·허상 기·김용이(金龍伊)가 시장에서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주민들과 독립만세를 부르기 로 한다. 만약 헌병이 출동한다면 모두는 헌병주재소로 이동한다. 또한 구금자가 발생하면 무리가 가더라도 구금자를 탈환한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헌병대에서 해산하지 않는 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는 “우리는 독립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계속 주민 참가를 설득하였 다. 그리고 3월 26일 오후 8시경에 자택에서 광목으로 태극기 3기를 만들었다. 3월 27일 육 창주·허상기는 주막에서 만난 김용이 등 8명과 함께 시장으로 갔다. 오후 1시경 육창주·허 상기가 100여명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한국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허상구·허상옥 (許相玉)·허찬(許贊) 등이 시장을 활보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헌병과 보조원이 해산을 종 용하였으나 군중들은 계속 만세를 불렀다. 분대장 상등병 안본이작(岸本理作) 등이 육창주· 허상기를 주재소로 연행하고, 주재소에 보관한다면서 태극기를 빼앗아 갔다. 김용이·허상 구·허량(許樑)·이면호(李冕鎬) 등은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어 김용이·허량이 구금되자, 군중들은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헌병들 의 사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여 일시 퇴각하였다. 오후 3시경 이일만(李一萬)이 동생 시신을 주재소로 운구하고 헌병들에게 항의하였다. 이때 옥천에서 출동한 헌병분대장이 독립만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