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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자를 부수는 등 건물 일부·기물·서류·장부 등을 파기하였다. 또한 오류리 송인식(宋寅植) 등 6명이 수십 명과 뒷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송인식·박병철·이용학은 주민들과 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감곡에서는 4월 3일 밤 송석봉(宋錫奉)·홍종훈(洪鍾勳)이 문촌리 주민 수십 명과 응봉산 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하였다. 이튿날에도 송석봉은 양묘장의 감독자인 면서기 이상석 (李相錫)에게 “너는 면관리이므로 네가 한국독립만세를 부르면 우리 면의 마을 주민들도 모 두 화창할 것이니 출역 인부와 함께 한국독립만세를 고창하라”고 요구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맹동에서는 4월 3일 강혜수(姜蕙秀) 등 4명이 마산리 주민들과 와우형산에서, 김화서(金 化西) 등 3명은 쌍정리 주민들과 뒷산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원남에서는 4월 5일 이교설(李敎卨) 등 3명이 보천리 시장에서 약 200여명과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5) 충주군 충주에서는 3월 말경부터 김종부(金鍾富)·장양헌(張良憲)·오언영(吳彦泳·彦榮)·최명 희(崔明熺) 등 4명이 야소교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최명희는 3월 27일 엄용 복(嚴龍福) 집에서 장날 만세를 권유하고, 28일에는 장양헌과 김종태(金鍾台) 집에 가서 독 립운동에 참여를 부탁하였다. 4월 8일경 4명은 권태은(權泰殷) 집에서 여교사 김연순(金漣 順·然順)에게 여학생 참여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김종부는 창칼로 왼팔을 찔러 피로 태극기 를 그리고, 독립을 고취하는 장양헌의 말을 태극기에 적었다. 또한 경고문·독립가 각각 1통 씩 작성하고 태극기 수십 기를 만들었다. 피로 그린 태극기를 오언영에게 전달받은 김연순은 소극적 자세에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경에게 사전 탐지되어 주도 인사 4명이 체포를 당하여 독립운동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신니에서는 3월 31일 은경옥(殷慶玉·段慶玉) 등 5명이 이희갑(李喜甲) 집에서 4월 1일 용 원 장날에 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드는 독립만세를 결의하였다. 은경옥·이희갑·이 강렴·손승억(孫承億)은 독립운동대표자로 선언서 7통을 만들고, 윤주영·윤무영(尹務榮)· 이강호(李康滈 )·김은배(金殷倍) 등과 태극기 9기를 제작하였다. 용명서당 은경옥은 서당 학 생들을 참여시키려 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에게 제지를 당하였다. 이들이 4월 1일 용원시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