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page

77 총 설 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칠성에서는 4월 3일 밤 쌍곡리 김동억(金東億)이 길가에서 괴산 시장에서 귀가하는 주민 약 15명과 독립만세를 불렀다. 4) 음성군 소이에서는 3월 19일·4월 1일 김을경(金乙卿)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3월 19일 오전 11시경 이중곤(李重坤) 등 5명과 읍내리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군중들과 독립 만세를 부르며 경찰주재소를 포위하고 유리창 등을 파괴하였다. 이들은 4월 1일에도 한내(漢 川·寒川) 시장에서 200여명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였다. 김춘흥(金春興·順吉)·이상근 (李相根·相益) 등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 일대를 활보하였다. 이어 면사무소에서 면 장 민동식(閔東植)을 끌어내어 “너도 조선 사람인 즉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자”며 독립만세를 선창시키고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경들은 김을경·이중곤을 음성경찰서로 압송하려다 가 군중의 강력한 석방 요구에 주재소에 인계하였다. 1,000여명 군중들은 계속 석방을 요구 하였다. 권재학은 “어째서 무고한 백성을 체포하는가? 당장 석방하라”며 장지문 등을 파손 하였다. 추성렬(秋成烈)·이교필(李敎駜 )은 “누구도 돌아가지 말고 김을경과 이중곤 구출에 진력하자”며 귀가 군중들을 제지하였다. 음성에서는 3월 27일 밤 김영익(金榮翼·榮韋)이 초선리 서당인 정기선(鄭騏善) 집에서 학 생 정민영(鄭玟永) 등 4명에게 “지금 조선 내 각지에서 조선 독립을 희망하여 독립운동의 수 단으로 대한국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다. 우리 일동도 내일 음성 읍내시장에 나아가 대한국독 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장에 나온 군중에게도 선동하여 동일한 행동을 하게 하자”고 권유하였 다. 이들은 3월 28일 오후 2시경 김영익이 싸전에서 학생들에게 ‘대한국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수백 명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활보하였다. 삼성에서는 4월 2일 밤 이성용(李性用)이 선정리 주민 수십 명과 뒷산에서 대한독립만세 를 고창하였다. 이어 주민 약 80명은 천평리 주재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일경들이 해산을 명령하자, 이성용은 막대기로 하야중차랑(河野重次郞) 순사의 오른쪽 어깨를 강타하 고 군중들도 항거하며 다음날 오전 2시경까지 독립운동이 계속되었다. 같은 날 대소에서는 임경순(任暻淳·林景淳) 등이 밤에 오류리 등 면민 수백 명과 오산리 면사무소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임백규(林白圭)·김달년(金達年)이 유리창을 깨뜨리고, 김동식(金東植)이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