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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총 설 오 5시경 오은영(吳殷泳)·조창림(趙昌林) 등과 협의하였다. 이튿날 오후 회죽리 면유림의 식수 작업 주민들에게 술대접을 하며 독립만세를 제안하고, 자신이 먼저 태극기를 흔들며 독 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정운화(鄭雲和)·남계홍(南啓弘) 등 주민 500여명이 호응하여 마을을 활보하고, 신축 중인 헌병주재소로 가서 시설과 공사장을 망가뜨렸다. 면사무소에서는 면서 기에게 “너희도 같은 조선 사람이다. 함께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하고, 돌·곡괭이·막대기 등으로 유리창·장지문 등을 파손시키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또 윤병한은 오후 8시경 면직원에게 인쇄 도구를 요구하였다. 이튿날 장날에도 계속 만세를 부 르기 위해 “대한제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만세를 외쳐라”는 광신사(廣信社)의 경고문을 김동 화(金東華)에게 쓰게 하고 소사 박수문(朴壽文)을 시켜 약 20매를 인쇄하여 밤에 장터 일대 벽에 부착하였다. 3) 괴산군 괴산에서는 3월 19일·24일 양일간 홍명희(洪命熹)·홍성희(洪性熹) 형제 주도로 독립만 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8일 홍명희·윤명구(尹命求) 등이 홍명희 집에서 3월 19일 장날 배포할 독립선언서를 만들기로 하였다. 홍명희가 선언서를 작성하여 이재성(李載誠)에게 주 고, 이재성은 홍용식(洪用植)과 3월 18일·19일 양일간 300매를 등사하였다. 이들은 3월 19 일 장날 동부·서부리에서 군중에게 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대한독립만 세를 고창하였다. 3월 24일에는 홍성희(洪性熹)·구창회(具昌會)가 오후 6시경 70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홍성희가 체포되자, 김인수(金仁洙)는 모자를 흔들어 만세를 부르 도록 군중을 독려하고, 민광식(閔光植)은 수진교에서 귀가자에게 “우리 동포가 경찰서에 체 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모두 장터로 돌아가 독 립만세를 부르자”고 호소하고, 권담(權澹)도 인사교에서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요구하 였다. 이때 군중은 2,000여명이나 되었다. 청안에서는 3월 30일 이태갑(李泰甲)·장성원(張聖源) 등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 였다. 이들은 읍내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각 마을에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 로 하였다. 김수백(金壽伯·壽福) 등은 오후 3시 반경 시장에서 3,000여명과 태극기를 흔들 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일경들이 유웅렬(劉雄烈) 등 7명을 주재소로 연행하자, 군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