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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총 설 강내에서는 3월 23·24일·26일 3일간 대성리 대성산에서 조동식(趙東植) 주도로 횃불독 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긴급한 상황을 봉화로 알리는 봉화 고변(烽火告變)의 예를 따라 산꼭대기에 횃불(焚火)을 올려 독립만세를 외치면 독립만세운 동의 기세가 발양(發揚)될 것”으로 인식하고 대성리 주민들과 대성산에서 횃불( 篝 火)을 놓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또 그는 3월 25일 조치원의 김재형에게 경고문 1봉(封) 약 45매를 받아 일부는 남겨두고, 나머지는 허영대(許永大)에게 주어 화정리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미원에서는 3월 30일·31일·4월 7일 신경구(申敬求)·오교선(吳敎善)·이성태(李聖泰· 聖台) 등 주도로 독립만세운동과 친일적 인사 질책이 있었다. 3월 30일 신경구는 오후 2시 경 미원리 장터에서 이용실(李容實)을 만나 담뱃대에 신봉휴(申鳳休)가 만든 태극기를 메어 들고 시장으로 나갔다. 이들은 네거리에서 20여명에게 만세를 권유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 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도 호응하였다. 헌병군조 식전이지조(植田利之助) 등 8명이 제 지하며 해산시켰으나 군중들은 더욱 격렬히 독립만세를 불렀고 군중도 100여명으로 늘어났 다. 헌병들은 해산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신경구를 주재소에 구금하였다. 이용실·윤인보(尹 仁甫) 등 7명이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이용실·이수란(李水 蘭) 등 12명의 주도로 “주재소를 파괴하라”며 돌을 던져 각종 시설들을 파괴하였다. 또 “주재 소장과 주재소원을 살해하라”며 주재소장을 구타하고 헌병들과 격투하며, 보조원에게도 “신 경구를 석방 인도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따라서 헌병들은 다만 주도 인사나 활동적 인 사들을 주시하며 청주의 지원 병력을 기다렸다. 보병 7명이 출동하자, 헌병들의 무차별 사 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독립운동으로 유리창 3장·정문 기둥 1개·표찰 1개·판 자 울타리 12척 등을 파손되고, 돌이 사무실내 50개 등 구내에 572개나 있을 정도로 주재소 에 맹공을 가하였다. 또 같은 날 오교선(吳敎善)·박우래(朴雨來·雨東)가 밤에 성태리 이상 옥(李相玉) 집에서 “내일 미원리로 와서 모두 만세를 부르기를 희망한다”는 유인물 3통을 작 성하고, 이상옥 등 3명에게 낭성·미원 면내 마을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오교선은 이튿날 미 원리에서 면민들과 다음날 오전 1시경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4월 7일에는 이 성태(李聖泰·聖台)가 오후 2시경 운교리 박재진(朴在鎭) 집에서 구장 이규하(李圭夏)가 “조 선독립시위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헌병주재소장에게 제출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는 곧바로 이규하에게 “너희들은 무슨 이유로 조선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