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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이를 가지고 일행을 에워싸고 독립만세를 독촉하였다. 그러자 군수 일행은 조선독립만세를 수회 고창하고, 주민들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이병익이 ‘독립만세연명부’에 서명 날인 을 요구하자, 군수도 서명을 하고 엄지 손가락으로 날인을 하였다. 16) 평창군 대화에서는 3월 16일 최상달(崔相達)이 이인영(李麟榮)에게 ‘조선은 일본의 압박으로부터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선언서 2매를 받았다. 그는 3월 23일 정선 화암리 손호국(孫 好國) 집에서 석곡리 최돈상(崔墩尙)에게 선언서 1매를 교부하고, 또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였다. 평창에서는 3월 21일 손상봉(孫相鳳) 등 5명이 유영묵(劉永默) 집에서 4월 4일 대화리와 5일 읍내 장날 독립만세를 결의하였다. 손상봉은 최태제(崔泰悌)·오정천(吳正天) 에게 권유하고, 4월 3일 이종하(李鍾河)와 태극기를 만들었다. 4. 충청북도 1) 청주군 청주에서는 3월 2일 독립선언서 배부가 시도되고 2차에 걸쳐 유인물 배포가 있었다. 인종 익은 이종일에게 받은 독립선언서를 3월 1일 전주에 전달하고 대전을 거쳐 3월 2일 청주 천 도교구실에 도착하였으나 미행하던 일경에게 체포를 당하고 독립선언서 286매를 압수당했 다. 이는 3·1운동과 관련된 충북 최초의 독립운동이었다. 이어 3월 9일 신횡호(申鑅 浩)는 수원에서 「우리 2천만 동포에게 경고함」(경고문)을 가지고 농업학교 기숙사에 도착하여 오 석영(吳錫永) 등에게 보여 주고, “청주에서도 서울에 못지않게 열성을 갖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오석영·이수천(李壽千) 등 5명이 찬성하여 경고문 배포를 결의하고, 김현구(金顯九) 집에서 임창수(林昌洙) 등 4명이 추가로 참여하여 300여장을 인 쇄하였다. 4월 1일에는 송재옥(宋在玉)·신광균(申光均)은 송재인(宋在寅) 집에서 ‘금일 시 장에서 모두 만세를 부르기를 희망한다’는 유인물 약 200매를 만들어 다음날 읍내 각처에 배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