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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총 설 11) 양양군 양양에서는 4월 4일부터 7일까지 4일간 읍내를 중심으로 다른 주도 세력들이 독립만세운 동을 전개하였다. 4월 4일에는 거마리 최인식(崔寅植)·이종태(李鍾台) 주도로 읍내시장에 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3일 최인식·김규용(金奎容) 등 4명이 4월 4일 읍내 장 날 독립만세와 태극기 제작을 합의하였다. 김재귀(金在龜)는 옥양목과 백지를 김필선에게 교 부하고, 김필선(金弼善)은 면사무소에서 ‘대한국독립만세’·‘양양군 문자’·‘태극 모양’ 등을 인쇄한 200매를 휴대하고 김재귀·김규용과 최인식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이교정(李敎貞) 집에서 옥양목에 태극기, 백지에 국기를 그렸고 이때 김계호(金啓鎬) 등 2명도 참여하였다. 태극기 제작 중에 군수 이동혁(李東赫)이 와서 인쇄기·태극기·국기 등을 일부 빼앗고 독립 만세를 제지하였다. 이들은 장소를 옮겨 거마리 이종태 집에서 일박하였다. 다음날 아침 이 종태가 옥양목 태극기를 흔들며 선두에 서고 최인식 등이 뒤따르고 시장가는 주민들에게 만 세를 권유하며 종이 태극기를 배부하였다. 오전 11시경 먼저 최인식이 조선독립만세를 선창 하고 김재귀 등이 화창하여 50여명과 시장 일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4월 5일 에는 최한두(崔漢斗)가 오전 9시경 주촌리 주민 약 40명을 인솔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읍 내시장으로 향하였다. 이때 우암리 김진열(金振烈)도 약 30여명을 이끌고 읍내로 왔다. 이들 은 합세하여 읍내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4월 6일에는 김종택(金鍾澤)이 상왕 도리 주민 약 20여명을 이끌고 태극기에 ‘조선독립의 기’라 쓴 2기를 앞세우고 읍내로 향하 였으나 남대천 다리에서 일경의 제지를 받았다. 이들은 다리 옆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 였다. 이때 연창리에 도천 면민들이 모였다는 것을 듣고 연창리로 가서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7일에는 박규병(朴奎秉)이 4월 초 동생이 독립선언서 소지로 구속된 것을 계기 로 독립만세를 부르고 경찰서로 가서 석방을 청원하기로 하였다. 그는 4월 6일 원일전리 가 마(釜) 제조장에서 약 40명에게 찬성을 얻고 다음날 아침 장동 이현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읍내로 갈 것을 약속하였다. 또 밤에 집에서 박용규(朴容圭)와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7일 아침 100여명은 이현에서 박규병을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읍내로 향하였다. 임천리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박규병 등 3명은 양양경찰서로 가던 중 용천리에서 일경에게 독립 운동자 구속의 부당성을 따졌다. 봉현에서는 4월 5일·6일 양일간 이능렬(李能烈)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