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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총 설 김순필이 4월 8일 교구실에서 판교 명덕리 김창하(金昌河)에게 “독립운동의 중심은 천도교 도 등인데…금 10원 이상을 제공하여 크게 이 독립운동의 원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권 고하였다. 특히 김병주와 김순필은 독립운동 자금까지 요청을 하였다. 독립만세운동으로 4 월 6일·8일 양일간에 실행되었다. 박재곤(朴在坤)·이원모(李元模)가 탑리 장날 독립만세 를 협의하고 4월 5일 박재곤 집에서 태극기 2기를 만들었다. 이들이 4월 6일 오후 4시경 시 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연호하였 다. 같은 날 정용규(鄭龍奎)·김연옥(金淵玉)·손은국(孫銀國)이 용포 창전리 마을 제사에 모인 100여명에게 독립만세를 제안하였다. 주민들의 동의로 정용규 등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비석리를 지나 탑리 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박응규(朴應 奎)·박송규(朴宋奎)는 4월 7일 남순리 박필주 집에서 협의하고, 4월 8일 아침 이형모(李亨 模)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마을을 다니며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하려고 하니 뜻을 같이 하 는 자는 집합하라”고 권유하여 약 50명이 모였다. 이계원(李桂元)도 오전 9시경에 박응규가 보낸 인사람의 권유를 받고 참가하였다. 박응규가 태극기를 흔들며 주민들과 저녁 무렵에 읍 내로 행진하여 200여명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서면에서는 3월 13일 김득필(金得弼)이 축동리 박창식(朴昌植) 집에 가서 “우리 마을은 어 째서 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만세를 부르면 조선이 독립하는 것이고, 또 독립하면 만세를 부 른 자가 양반이 되는 데 반해서 부르지 않는 자는 처벌을 받는다”, 이어 전정순(全貞淳)·김 충렬(金忠烈) 집에서도 “먼저 구장이 마을 주민에 솔선하여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요구하였 다. 전정순 집에서는 노동국(魯東國)·박동근(朴東根) 등에게도 권유하였다. 낙양에서는 4월 4일·5일 양일간 김병하(金炳河)·이여종(李呂鍾)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김병하가 4월 4일 내낙리 김응제(金應濟)를 찾아가 김이순(金利淳)·이여종(李 呂鍾) 등과 독립만세를 협의하고 태극기 2기를 만들어 이두영(李斗榮)·김혁근(金赫根)에게 교부하였다. 이두영·김혁근은 오후 3시경 문석리시장 군중들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 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김병하·이여종 등은 오후 10시경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 고 이동 중에도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여종은 박총영(朴叢英) 집에 가서 지하리에 서 만세를 부르는데 “만일 응하지 않으면 돌로 때리겠다”고 하였다. 오후 11시경 약 20명이 지상리에 이르러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주민들을 깨웠다. 김병하가 4월 5일 오전 2시경 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