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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총 설 만세를 부르자” 요구하였다. 이때 헌병 상등병 유촌상길(有村常吉)이 출동하여 군수에게 상 황을 파악하고 한범우를 체포하였다. 또 4월 9일 표광천(表光天)·지천복(池千福)이 천리 주 민 수십 명과 산수동 응봉산 마루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김복기(金福基)· 정완용(鄭完用)의 선창으로 4월 11일 이재관(李在琯)·이은교(李殷敎) 등 소곡리 주민 수십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소초에서는 4월 3일 신현철(申鉉喆)·신현세(申賢世) 등이 평장리 주민들을 규합하여 4월 4일 수백명과 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귀래에서는 4월 7일·8일 양일간 밤에 김현수(金顯洙)·김현홍(金顯洪)이 귀래리 주민 수 백명과 마을 언덕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건등·지정·흥경에서는 4월 8일 독립만세와 권유 활동이 활발하였다. 건등에서는 밤늦 게 김현구(金顯九)·유인수(柳寅秀)가 궁촌리 뒷산에서 김원기(金元起) 등 5~60명 주민과 조 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구장 이희원(李熙元)이 제지하자, 주민들은 구장도 만세를 부르라 고 요구하였다. 김현구는 김종성(金鍾聲)에게 “네가 오늘 밤 만세운동에 참가하지 않으면 좋 지 못할 것이다. 또 이곳 구장도 구장이다. 그는 이 마을의 구장이 아니라 관청의 구장이다” 라 말하고 광목으로 태극기를 만들게 하였다. 또한 최재희(崔在熙)도 밤에 “궁촌동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여 북촌에서도 불렀다”며 주민들을 모아 오후 10시경 20여명과 서 석동 밭 가운데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그리고 곽한선(郭漢璇)도 밤에 반계리 주민에 게 다른 마을을 본받도록 권유하여 수십 명과 마을 서북쪽 언덕에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전 개하였다. 지정에서도 유준열(柳俊烈)·박종형(朴鍾瀅)·이근돌(李斤乭)이 오후 10시경 박종 명 집 앞에서 가곡리 주민 6명과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흥경에서는 원성규(元成圭)·이재 손(李在孫)·윤산악(尹山岳)이 원현복(元顯福) 집에서 서당교사 김수익(金壽翼)에게 독립만 세 고창 취지의 격문을 부탁하였다. 이들은 격문을 돌려 읽도록 권유 활동을 하였다. 흥업에서는 4월 9일 이현순(李賢淳)·홍대성(洪大成)이 흥업리에서 독립만세를 결의하고 홍학성(洪學成)에게 주민을 모이게 하였다. 40여명은 면사무소 뒤쪽 언덕에서 조선독립만세 를 고창하고 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주민들은 “면사무원은 도망하지 않았느냐?”, “면장은 나오라”고 외쳤다. 면장 서정우(徐廷禹)가 사무실을 나와 “해산하라”고 설유하자, 주민들은 오히려 면장에게 만세를 부르라 요구하고, 분위기에 압도된 면장은 결국 독립만세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