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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박성록이 깃발을 받아 앞세우고 이은규가 지휘하여 읍내로 “조선이 독립되었으니 만세를 부르러 가자”며 동지화동으로 이동하였다. 김용구(金容九)도 면민단대표자 깃발을 앞세우고 김한식과 독립만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김창의는 출발할 때 김한식에게 “이 깃발을 경찰관이 보기만 해도 빼앗으려고 할 터이니 빼앗기지 않도록 하 라”고 지시하였다. 신읍리 주민들은 한정종(韓丁鍾)이 이끈 상서 호동리 주민들과 직동의 수 차 소옥 부근에서 합세하였고, 이들은 상리 다리에서 안종화가 이끈 노동리 주민들과 합류하 였다. 군중이 동지화동에 이르렀을 때 헌병오장 야상미희남(野上美喜南)과 상등병 조판무리 (早坂茂利) 등이 해산을 강요하고 깃발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이에 김창의·한정종 등 주도 인사들은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항거하였다. 헌병들은 후방에서 감시하며 해산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김창의·이은규·박성록 등은 해산자에게 참여를 독려하였다. 헌병들은 지원 헌병과 보병들이 오는 것을 보고 동남동 남단 고개 밑에서 군중을 막았다. 야상오장·지원병 북촌(北村) 오장 등 헌병·율림(栗林) 중위 등 보병들이 주도 인사 체포를 시도하였다. 김용 구는 깃대로 야상오장을 때리는 등 헌병과 육박전을 벌이고, 박성록은 헌병 가슴을 구타하고 북촌(北村)오장을 차서 길위에서 논 가운데로 떨어지게 하고 조판 상등병과 몸이 엉키어 밭 가운데로 밀려 넘어졌다. 김창의 등 10여명이 약 30분 동안 항거하였다. 김창의·이은규· 박성록·강석대(姜石大) 등이 체포을 당하고 2~3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편 3월 23일 김창의의 권유를 받은 길호순(吉浩順)이 3월 29일 화천 장날 독립만세를 결 심하였다. 그는 3월 28일 박장록(朴章祿)의 찬성을 얻고, 박장록은 김중배(金仲培) 집에서 김응선(金應善) 등 수명에게 권유하고 김중배에게 주민 규합을 의뢰하였다. 김중배는 이장 강진희(姜陳希)에게 부탁하였다. 5) 원주군 부론에서는 3월 27일 군수에게 독립만세를 요구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범우 (韓範愚)·한돈우(韓敦愚)·김성수(金性秀) 등이 오후 4시 30분경 노림리 길가에 있을 때 군 수 오유영(吳唯泳)이 사택으로 퇴근하였다. 김성수가 ‘조선독립만세’ 깃발을 흔들고 노림서 당 학생 6명·농민 2명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군수 뒤를 따랐다. 이들은 군수에게 “철 원군수는 민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는데 너는 어째서 부르지 않느냐? 함께 조선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