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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총 설 50명 주민을 모아 뒷산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한편 김옥봉(金玉鳳) 집에서 유정 근·이두연(李斗淵)·이종우(李鍾禹) 등이 있다가 만세 소리를 듣고 유정근의 제의로 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두 만세 주민들은 곧 합류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상 열(李相悅)은 송병창 등이 집 앞까지 와서 독립만세를 불러도 불참하다가 주민들이 대문을 파괴하므로 하는 수 없이 둘째 아들을 보내어 조항까지 군중을 따라 가도록 하였다. 이 독립 운동은 분일리 점산·수동·상촌·조항 등 각 동리를 순회하면서 전개되었다. 4) 화천군 화천에 독립선언서는 3월 3일 안상호(安商浩)가 하남에 배포하라며 최기호(崔己浩)에게 88매를 배부하여 도착하였다. 최기호는 구장 김준모(金俊模) 등과 논미 교구실에서 김연건 (金然健) 등 수명에게 28매를 교부하고, 김연건 등은 밤에 원천리 등 각 곳에 첨부하였다. 노 병하(盧炳夏)가 김준모 집으로 30매를 가져왔고, 그 중 1매를 김희인(金熙仁)이 부친인 김창 의(金昌義)에게 전하였다. 화천에서는 3월 23일 김창의 주도로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김희인은 독립 선언서 첨부로 헌병분견소에서 훈계를 받고, 3월 20일 안종화(安鍾和)가 “동지 규합에 곤란 을 겪고 사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한인종(韓仁鍾)에게 듣고 부친에게 전달하였다. 김창 의·이은규(李殷奎) 등은 3월 21일 이은규 집에서 “다음 23일은 화천읍 장날이므로 동 시장 에 참집한 군중을 선동하여 크게 소동”을 결의하였다. 이달룡(李達龍)은 ‘조선독립만세’ 깃발 과 ‘화천면 민단 대표자 김창의·이은규·김성모(金星模)’ 깃발을 제작하였다. 박성록(朴成 綠) 등이 하남 논미리와 상서 구운리 등에 독립만세 취지를 전달하고, 김창의는 3월 22일 논 미리 도로 인부들에게 권유하였다. 3월 23일 아침 헌병 상등병 조판무리(早坂茂利)와 보조 원 등이 김창의에게 “불온한 일을 하고 있지 않느냐”며 동행을 요구하자, 그는 “우리는 독립 운동의 주창자이다…헌병의 요구에 응할 필요가 없다”고 응대하고 보조원에게 “너는 선인의 정신이 있다면 우리 행동에 가입할 것이다”라 말하였다. 이어 주민 12명이 헌병과 보조원을 둘러싸며 압박하였다. 김창의는 아들에게 주민을 모으게 하여 김한식(金漢植)·김한수(金寒 洙) 등 5~60명이 집합하였다. 그는 “서로 천도교도이므로…우리들도 만세를 부르지 않아서 는 안된다”며 ‘조선독립만세’기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그러자 약 20명 가량이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