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page

59 총 설 못하므로 이 선언서를 조선 전도에 배부하여 독립을 계획하려는 소이이다”라며 신동민에게 30매를 주었다. 신동민이 교부하여 박윤식(朴允實)이 5매를 암정리 수개소, 윤규우(尹圭祐) 가 5~6매를 근북면 백덕리에 붙였다. 기오에서는 3월 28일·29일 양일간 고태흥(高泰興)·김연태(金演台) 등 주도로 창도리시 장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고태흥이 3월 28일 낮 김상묵(金相默) 집에서 연명부를 정시영(鄭始永)에게 보이고 독립만세를 제안하였다. 고태흥·정시영·조재성(趙載 成)·오운산(吳雲山) 등 20명이 기재된 연명부를 정시영이 받아 유만학(劉萬學)에게 주었다. 밤에는 김청민(金淸敏)·황중문(黃仲文) 등이 6~700명을 이끌고 창도리시장에서 독립만 세를 불렀다. 처음에는 김연태가 혼자서 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독립을 위해 모 두 기꺼이 만세를 부르지 않아서는 안된다”, “나오지 않는 자는 이 마을에서 축출하든지 집 을 태워버리겠다”고 하였다. 또 김청민·황중문·이순흥(李順興)·이대섭(李大燮)·김현기 (金顯基) 등에게 만세를 권유하였다. 이어 2~30명도 집집마다 “나와 만세를 부르라”며 외치 고 문을 부수거나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군중들은 주재소 서쪽 다리를 건너 자갈밭에서 돌 을 주어 헌병주재소 유리창 4개를 파손시키고, 이어 우편소 유리창도 깨뜨리고, 잡화상 원전 정추(原田政木追 )와 면장 이준재(李俊宰) 집 대문을 발로 차는 등 오후 12시까지 독립운동 을 전개하였다. 이어 이튿날에도 오전 8시, 100명이 만세를 불렀다. 헌병의 해산 명령에 군 중은 “하려거든 해 보라”며 김연태·정시영 등 주도로 계속 만세를 불렀지만 헌병의 발포로 일단 해산하였다. 9시경부터 김연태가 마을을 다니며 “만세를 부르러 꼭 나오라”고 부탁하였 다. 11시경 유만학·정시영 등 군중은 헌병대 앞마당에서 만세를 부르고 읍내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다니며 만세를 외쳤다. 정오경에 분대장이 “만세를 불러서는 안된다”, 저녁때는 보조 원이 “만세를 부르면 총을 쏘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정오경 김연태가 도로에서 “오늘밤 만세를 부르지 않는 자는 구타하라”, “출장자는 기록하고 날인해 두라”라 외쳤다. 황 중문·정시영 등의 발의로 유만학·오유근(吳留根) 등을 황중문이 기록하였다. 또 김청민은 옥양목 3척을 둘로 찢어 태극기를 그려 김상옥(金相玉)에게 주고, 김현기에게도 기를 주었 다. 오후 5시경 이순흥은 김연태에게 태극기 1기를 받아 집 앞에 세웠다. 김연태는 국기를 들 고 “오늘 밤도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집이든지 무엇이든지 부숴버리겠다”, 황중문·정시영 등도 “나오라! 나오라!”고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밤에 김연태·고태흥·유만학 등의 주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