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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총 설 Ⅱ . 3·1운동의 의미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무단통치하에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3·1운동은 민족운동으로 민족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첫째, 3·1운동은 민족독립운동사의 최대 민족운동이었다. 일제의 지배 하에서 전개된 민 족운동 가운데 3·1운동은 지역적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동 시기에 전개된 민족 운동이고, 참여 인원에서도 2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한 민족운동이며, 일제의 탄압으로 사망자 7,500명, 부상자 15,000명, 피검자 47,000명 이상의 인적 피해를 입은 민족운동이 었다. 따라서 3·1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최대의 민족독립운동이었다. 둘째, 3·1운동은 민족독립운동사의 분기점 역할을 하였다.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 민족운 동이 이념적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던 의병의 무장투쟁론과 애국계몽가들의 실력양성론이 1910년대부터 상호 보완적으로 통합되면서 민족독립운동의 역량과 저변을 확대시켰다. 그러 한 민족운동이 3·1운동으로 통합되었고 이어 새로운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즉 종전의 단 체나 개인별 민족독립운동이 전 국민과 전 민족의 구성원이 민족독립운동에 참여자가 된 것 이 3·1운동이다. 또한 민족독립운동이 3·1운동으로 수렴만 된 것이 아니라 3·1운동 이후 다양한 형태의 민족독립운동 발산에 기폭제이자 민족운동의 용광로 역할을 하였다. 셋째, 3·1운동을 계기로 개개인이 국가과 민족의 구성원으로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주체자가 되었다. 3·1운동이 전 국민과 전 민족의 참여로 전개되었던 만큼 남녀노소는 물 론이고 다양한 계층과 직업인이 참여하였다. 3·1운동이 확산되면서 누구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누구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이는 개개인이 국가와 민족의 한 구성 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당당히 국가와 민족에 책임을 자각하는 주체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3·1운동을 통하여 한민족 개개인이 바로 우리 역사의 주체가 되었다. 넷째, 3·1운동은 최초의 공화정부가 생겼고, 각 공화정부를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정치체제는 종전의 군주제와 같은 정부 형태가 아니 라 공화정체를 근간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한성·상해·연해주 등지에 만들어졌다. 이를 통 합하여 상해에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