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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총 설 소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양재옥 등이 전날에 이어 학생 전부를 이끌고 시장으로 나갔 다. 최창혁(崔昌赫)·김용규(金容珪)가 학생에게 만세를 권유하고, 윤규희(尹奎熙)가 태극기 를 배부하고, 이인영(李寅永)이 “조선 독립 목적을 수행하려면 영구히 일본과 동화하여서는 안된다”는 고문(告文)을 배포하고 여덟번이나 연설을 하였다. 학생과 이기훈·이응식 등 면 민 1,000여명은 태극기를 흔들며 싸전 및 시장 일대와 주재소 등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 다. 한편 문재홍(文在弘)은 오전 10시경 일본인 삼시차(森市次) 가게에서 보통학교 학생에게 일본 상품을 구입하지 말도록 타이르고, 군중들 앞에서 “독립하면 일본 화폐는 필요없다”며 10전짜리를 찢어 버렸으며, 해질 녘에 시장과 주재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밤 에 유춘삼(柳春三) 등이 장원리 주민들을, 조문삼(趙文三) 등이 매산·용설·장릉리 주민들 을 이끌고 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보통학교 등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원곡에서는 4월 1일 원곡·양성 면민들이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보다 앞서 3월 28일 내가천리 이시순(李時順)이 독립만세를 발의하고, 3월 28일·29일 양일간 최 승지(崔承知)·남용희(南用熙)가 지문리 주민들과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3 월 29일·30일·31일 3일 동안 원곡의 각 동리 주민들은 독립만세를 연호하였고, 31일 해산 때 홍창섭(洪昌燮)·이유석(李裕奭)이 주민에게 “명일도 모이라”고 하였다. 4월 1일 독립운 동은 원곡·양성 면민의 합동으로 양성주재소를 공격하고 이어 우편소·일본인 잡화상과 대 금업자 집·원곡면과 양성면사무소 공격으로 전개되었다. 원곡 칠곡리에서는 아침에 주민들 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최은식·이유석·홍창섭·이순익(李順益)·이근수(李根洙)· 조경숙(趙敬淑)·남현서(南玄西) 등의 권유와 활동으로 오후 8시 면사무소에 내가천·외가 천·칠곡·주백·월곡 및 승판리 주민 1,000명이 모였다. 군중들은 면사무소 앞과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면장을 끌어내어 이를 선두에 세우고 양성으로 가자”고 하였다. 이유 석 등이 면장 남길우(南吉祐)에게 태극기를 들리고 선두에 세워 양성 동항리(구양성읍내)로 출발하여 횃불을 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원곡과 양성면 경계의 고개 에 이르자, 이유석은 먼저 “이렇게 많은 군중이 집합하였음은 천운이다. 제군은 양성경찰관 주재소로 가서 일본인 순사와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고 이어 최 은식·홍창섭·이근수·이덕순(李德順)·이희룡(李熙龍·時殷)도 차례로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 정책을 시행하는 관청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같이 원곡·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