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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총 설 해 순절한 것”이라 주장하고, 또한 양자가 사망하였는데도 군중이 머뭇거리므로 고읍 면사 무소에서 “양근 읍내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호소하였다. 군중들은 옹암리와 용암리의 언 덕까지 만세 행진을 하였다. 청운에서는 3월 23일 용두리 장날 신재원(申在元)·정경시(鄭慶時)가 시장 길에서 김종학 (金鍾學)·민주혁(閔周爀)에게 권유하여 4명은 여물리 다리 아래에서 ‘조선독립기’ 3기를 만 들었다. 이들은 오후 3시 40분경 김종학·민주혁이 조선독립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에 이르러 150여명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헌병 상등병 좌좌목정길 (佐佐木政吉) 등이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도 인사를 체포하였다. 갈산에서는 3월 24일 양근리시장에서 약 1,000명이 조선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였다. 이 신규(李藎珪)는 독립선언서 수십매와 대한독립회(大韓獨立會)의 격문 수십매를 가지고 3월 23일 경성을 출발하여 다음날 양근리에 도착하였다. 그가 시장 큰 길에서 “조선 민족은 이 기회를 타서 일본 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연설하고 선언서와 격 문 수십매를 배포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도 호응하였다. 오후 2시경부터 약 400명이 헌병분견소·면사무소·군청·박희영(朴熙英) 집을 다니며 공격·파괴하는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군청에서는 유리창·국세 및 제세금부징수 정리부 등이 파손되었다. 2 시 40분경 시장에서 이진규·곽영준이 헌병분견소에 인치되자, 군중들은 “체포자를 내 놓으 라!”고 외치며 사무실 등을 파괴하였다. 김경성(金慶星)은 3시경 3~40명과 면사무소로 가서 면장 김찬제(金讚濟)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하고, 군중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고 강박하였다. 이용준(李容俊)은 면장과 면서기를 밖으로 끌어내고, 이용준·김경성이 면장을 폭행하고 군중도 가세하여 약 30분간 옥신각신하였다. 군중들은 사무실 창문 유리를 부쉈 다. 군중들은 다시 양근리시장에서 만세를 불렀고, 한봉철(韓奉喆) 등은 우편소 유리를 부수 고, 김석봉(金石鳳) 등은 박희영 집에서 “군수와 면장이 잠복하였을 것이다”며 방을 뒤지기 도 하였다. 이 독립운동으로 시장이 열리지 못하였다. 강상에서는 3월 29일 신석영(辛錫永)이 교평리 주민 약 100명과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 다. 갈산 양근리 장(場)이 정지되어 한강 건너편 교평리 도선장에 주민들이 모였다. 그는 “조 선이 이미 독립하였다”며 도선장에 세워 둔 태극기를 뽑아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어 군중도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