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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하고 가재 도구도 밭에서 불태웠다. 이후 군중들은 면사무소로 갔다. 이담이 면장에게 “이 은선의 죽은 원인을 확인하러 주재소에 가 달라”고 하자, 이경희(李敬凞)가 “명일은 순사도 올 것이니, 면사무소 게시판에 ‘우리들이 모인 것은 이은선의 죽은 원인을 확인하기 위한 것 이다’는 뜻을 써 붙여 두고, 명일 오전 9시를 기하여 모이자”고 하여 일동은 찬성하고 해산 하였다. 용유에서는 3월 28일 조명원(趙明元)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3월 23·4 일경 조종서(趙鍾瑞)를 만나고 이어 최봉학(崔奉學)·문무현(文武鉉)을 남북리로 불러 밤에 ‘혈성단(血誠團)’ 명의로 3월 28일 거사를 결정하였다. 이들은 대형 태극기에 ‘혈성단 주모자 조명원·조종서·문무현·최명교(崔明敎)’라 쓰고, “조선독립운동을 거사할 것이니, 28일 관청리 광장에 모이라”는 격문 80여통과 신서(信書) 1통을 남북·거잠·을왕·덕교리에 배 부하였다. 3월 28일 관청리 광장에 150여명이 모였고, 을왕리 주민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합 세하였다. 이들이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면민들도 연호하였다. 대부에서는 3월 31일 김윤규(金允圭) 등이 오후 11시경 태극기를 만들고, 다음날 오전 3시 경 집 밖으로 나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동리(東里) 주민 십수명이 주막에서 태극기 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남동에서도 3월 31일 송성용(宋聖用)이 김춘근(金春 根) 등과 “4월 1일 남동면 질천시장에 주민을 모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는 통지서 수매를 구장들에게 배부하였다. 11) 양평군 고읍에서는 2월 13일경 최대현(崔大鉉)이 고종 제사비 기부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전개하 였다. 그는 강(姜)모에게 글을 부탁하고, 양자 최윤식(崔允植)은 십 수매를 만들어 2월 하순 경 11개 면장에게 배부하였다. 이어 3월 27일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3월 31일에는 통지를 받고 오후 11시경 면사무소 부근에 나가 30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튿날에 도 오전 4시경 도곡리 면사무소·헌병주재소에서 2,000여명과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4월 3일에는 윤기영(尹璣榮) 등과 주도하여 창리에서 강상·강하·양서·고읍 4개 면민 약 4,0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읍내 독립만세 여부를 논 의할 때, 최대현은 “경성 사람이 양평에서 오늘 아침 피살된 모양인데, 그 사람은 국가를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