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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총 설 튿날에는 권희(權憘)가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 하려 한다…각 이민은 구 한국기 1개씩을 휴대하고서 와서 모이라”는 「비밀통고」를 각 마을 에 회람시켰다. 장곡리에서 장수산(張壽山)이 구장 이종영(李鍾榮) 집 앞에 놓아 주민 회람을 시켰고, 이종진(李鍾振)은 오후 3시경 통고를 발견하여 이종형(李鍾亨)·이덕증(李德增)을 거쳐 오후 6시경 월곶리 구장에게 보냈다. 10) 부천군 계양에서는 3월 24일 심혁성(沈爀誠)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오후 2시 장기리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약 600명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라” 권유하고 함께 만 세를 고창하였다. 부내주재소 순사 이궁희삼차(二宮喜三次)·순사부장 화뢰훈(花瀨勳)·순 사 2명이 심혁성·정태용(鄭台鎔)을 면사무소로 인치하고 해산을 명령하여 일부 군중들은 흩어졌으나 약 300명쯤은 계속 심혁성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5시경 일경들이 심혁성을 주 재소로 옮길 때 군중들은 “심혁성을 반환하라”며 순사들을 강박하며 시장 5~60간(間) 지점 에서 막아 세웠다. 이어 순사들을 붙잡고서 머리와 기타 신체를 주먹으로 치고 찌르며 폭행 을 가하였다. 10여분간 다툼으로 포승줄이 풀려 심혁성은 벗어났으나 계속되는 충돌로 이은 선(李殷先)이 칼에 찔려 현장에서 순국하고 윤해영(尹海榮)은 머리 등에 부상을 입었다. 사 태 악화를 염려한 일경들은 5시 30분경 철수하였다. 이은선의 조카 이금산(李今山)이 면장 안병혁(安炳赫)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하고, 아내도 “피살된 원인을 확인하러 부내주재소 로 가자”고 주장하였다. 이담(李墰 ·泰鉉·泰連)은 해진 후 6촌 이은선이 피살된 사실을 듣 고 면사무소로 갔다. 면장이 귀가하려 하자, 이담이 쫓아가서 “구장에게 통지하여 이민들을 모아 주재소로 가서 피살된 원인을 확인하여 달라”고 압박하였다. 이에 면장은 면서기 이경 응(李敬應)·임대규(林大圭)를 데리고 이담과 송희진 집에 가서 이담의 말대로 이경응이 “죽 은 사람에게 동정을 표시하는 자는 오후 12시까지 면사무소에 집합하라”는 초안으로 만들었 다. 초안을 쓴 이경응은 모친의 근심을 핑계로 집에 갔다. 면장과 임대규는 6~7매 통문을 만 들어 구장들에게 회부하였다. 12시경 약 200명이 면사무소에 집합하였다. 이경응이 오지 않 자, 이담·면장 등이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담이 이경응의 집을 부수자고 제안하고 면장의 동행을 요구하여 100명이 집으로 가서 지붕과 기둥만 남기고 철저히 파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