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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다가 시장 입구에서 일경의 제지를 받았다. 고촌에서는 3월 24일 김정국(金正國)·윤재영(尹在英)은 50여명과 신곡리 뒷산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튿날에는 김정의(金正義)·김남산(金南山)·이흥돌(李興乭)이 태극기 2기를 교대로 들고 주민 약 50명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8) 고양군 한지에서는 3월 9일과 23일에 독립만세운동과 유인물 배포가 있었다. 정철근(鄭鐵根)이 3월 9일에 춘천으로 귀향하던 중 왕십리 보통학교 앞에서 약 100명과 독립만세를 고창하 였다. 3월 22일에는 이두현(李斗鉉) 등이 서빙고리에서 태극기 3기를 만들고, “이때 이민 (里民)은 반드시 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라”는 ‘경고’를 게시판에 붙였다. 이어 3월 24일에는 “동·서빙고리의 각 상점은 문을 닫고 음 2월 27일을 기하여 마을 주민 전부가 조선독립만 세를 높이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유지가 일동에게」를 권중섭(權重燮)에게 보내는 등 독립 만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3월 23일에는 홍광옥(洪光玉) 등이 왕십리 산에서 주민들과 독 립만세를 외쳤다. 용강에서는 3월 9일 이영준(李永俊)이 중동학교 앞에서 “조선인 헌병 보조원 및 순사보는 각자 그 직장을 사직하고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에 힘쓰라”는 경고문 약 30매를 받아 합동 부 근 민가에 투입하고, 또 헌병 보조원 이용석(李用奭)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라면 이 때에 독 립운동에 참가하라”며 교부하였다. 독도에서는 3월 12일과 26일에 손흥복(孫興福)·김완수(金完守) 등 주도로 독립만세운동 이 있었다. 3월 12일에 손흥복 등이 농학교 뒤에서 간이농학교·보통학교 학생들과 결의하 여 하교 후 학생 약 30명과 보통학교·우편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6일 밤 에는 김완수가 수천명을 이끌고, 신원룡(申元龍)·최자근동(崔者斤同)이 선두에 서서 동독도 리 수개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헌병의 발포로 군중들이 이탈하자, 김완수는 “피하 지 말라! 피하지 말라!”고 외쳤다. 숭인에서는 3월 23일 김철배(金哲培)·임수학(林壽學)·이경혁(李慶赫)이 용두리에서 군 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