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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총 설 7) 김포군 양촌에서는 3월 19일에 누산리 박충서(朴忠緖)가 박승각(朴勝珏) 등과 격문·경고문 십수 통을 작성하여 오인환(吳仁煥)·정억만(鄭億萬) 등과 면내에 배포하였다. 이어 3월 23일에 는 양곡시장에서 군중 수백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월곶에서는 3월 22일, 28~29일과 4월 9일에 각기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3월 22일에 는 성태영(成泰永)이 박용희(朴容羲)와 결의하고 군하리 장날 군중에게 공자묘(향교)로 모이 라고 권유하였다. 향교에 200명이 모이자, 성태영·백일환(白日煥)은 마을을 순회하며 조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300명 군중이 면사무소로 갔다. 성태영이 면서기 조원석(趙元 錫) 등 4명에게 “만세를 선창하라” 요구하여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백인환은 약 400명 군중 과 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성태영이 독립 연설을 할 때 순사 산전중양(山田重洋)이 제지하자, 백일환은 순사의 따귀를 때리고 호신용 총을 빼앗으려고 밀어 넘어뜨리고 수명이 십수회 난 타하는 등 폭행을 가하였다. 또 “당신은 조선인이니 독립만세를 외쳐라”는 군중들의 요구에 불응한 순사보 이성창(李聖昌)을 끌고나가 넘어뜨리고 발길질 등을 하였다. 박용희 등은 재 차 면사무소에서 면서기에게 “한국 국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3창하라”고 요구하였다. 조 원석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어 면서기 3명도 차례로 만세 3창을 하였 다. 이병린(李炳麟)도 박용희의 권유를 받고 약 200명을 이끌고 통진보통학교·면사무소· 주재소 등에서 만세 행진을 하였다. 그는 순사보 이성은(李聖恩)에게 독립만세를 요구하였 다. 최우석(崔禹錫)도 고정리 주민 300명과 군하리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8 일에는 조남윤(趙南潤)·당인표(唐寅杓) 등이 “명 29일 오전 11시에 전 통진 읍내에 집합하 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는 문서 7통을 면내에 배포하였다. 또 정인교(鄭仁敎) 등은 주민 수십 명과 함반산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어 3월 29일 오전 11시경 400여명을 지휘하여 공자 묘·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정오경 갈산리에 모인 수백 명도 오후 2시경 공 자묘·보통학교·면사무소 등으로 이동하며 만세를 고창하였다. 4월 9일에는 임용우(林容 雨)가 명덕학교 운동회 개최를 기회로 참관자 이재관(李載寬)·차경창(車敬昌)과 협의하여 학생·주민 수십 명과 진리 해안에서 만세를 외쳤다. 대곶에서는 3월 22일 정인섭(丁寅燮)이 ‘독립만세’라 쓴 태극기를 만들고, 이튿날 오후 4시 경 시장에서 300여명 속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어 주재소·면사무소로 이동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