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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총 설 융조합·보통학교·천도교구실 등을 순회하였다. 분견소 헌병들은 해산 명령을 내리고 이 윤석·정흥교 등 십수 명을 구금하였다. 이어 3월 16일에는 구금 인사 탈출을 위한 독립운 동이 있었다. 정성교가 동생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동지들의 활약으로 성황당 과 목동리에 약 200명이 모였다. 장기영·정성교 인솔로 군중들은 헌병분견소로 이동하다 가 당고개에서 경성에서 파견된 헌병들과 충돌하였다. 군중들은 헌병의 멱살을 쥐며 “죽일 테면 죽이라!”, “오히려 죽여 달라!”고 덤벼들었고, 돌을 던지는 등 격렬히 저항하였다. 이 에 헌병들은 공포를 발포하여 제지하였으나 군중들은 오히려 총기 탈취를 위해 격투를 벌 였다. 이에 주춤하던 헌병들은 지원 보병이 도착하자, 주도 인사를 체포하며 만세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5) 강화군 부내에서는 3월 18일 오후 2시 읍내시장에서 10,000여명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사들이 참여한 독립운동이었다. 유봉진(劉鳳鎭)은 3월 8일경 이 진형(李鎭亨) 집에서 황유부(黃有富)·황도문(黃道文) 등과 동지 규합과 역할 분담을 협의하 였다. 이후 그는 동지들과 결속을 강화하며 「독립선언서」·「국민회보」 등을 지역민에게 배포 하였고, 황일남(黃日男)·황윤실(黃允實) 등은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독립운동을 준비하였 다. 3월 18일 주도 인사들이 각기 태극기를 가지고 삼삼오오 시장으로 모였다. 오후 2시경 신문리 시장 쪽에서 조대신(趙垈信)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시작하니 군중들은 중앙 돌다리 부근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큰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유봉진은 조금 늦게 백마를 타고 시장에 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왕래하고, 종루의 종을 쳐서 분 위기를 고조시켰다. 독립만세가 한층 고조되자, 순사와 순사보 8명이 유봉진·유희철·조대 신 등을 체포하고 군중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들은 순사보를 찌르고 구타하여 유 봉진을 탈출시키고, 태극기를 탈취하려는 순사보의 따귀를 갈기는 등 일경들의 진압에 항거 하였다. 이어 군청에서 유봉진이 약 2시간 반쯤 독립 연설을 하였다. 군중들은 군수 이봉종 (李鳳鍾)에게 “만세를 부르라”, “부르지 않으면 밤이 밝아도 가지 않겠다”, “만약 불응하면 군 청 청사를 파괴하겠다”며 독려하여 결국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사환의 급보를 받은 순사·순사보 십 수 명이 군청에 출동하여 군중을 제지하였다. 또 유봉진이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