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page

3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명이 오산리 대들벌과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구리에서는 3월 28일 이강덕(李康德)·심점봉(沈點奉)이 오후 5시경 아천리 주민 수십 명 과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 토평·교내리로 가서 독립만세를 연호 하였다. 3월 29일에도 아차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세우고 주민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진접에서는 3월 29일 봉선사에서 이순재(李淳載)의 발의로 ‘조선독립단임시사무소’ 명의의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소요를 영속시켜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문서 약 200매를 만들었다. 강완수(姜完洙) 등 4명은 오후 9시경부터 다음날 오전 5시경까지 진벌· 중촌리 등 4개 마을에 배포하였다. 밤에는 이재일(李載日)이 “부평리의 이민 일동이 광릉천 강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라”는 통문 1통을 주민들에게 보이고, 3월 31일 양삼돌(梁三乭) 등 주민 100여명과 광릉천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시둔에서는 3월 29일 조염호(趙念鎬)가 자일리 주민 약 30명과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별내에서는 3월 하순 유해정(柳海正)이 고산리 집에서 “한국을 강탈한 나머지 태황제 폐하 를 독살까지 하였으니…자기도 한 자루의 칼을 품었으니, 한번 죽음으로써 원한을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다”는 봉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글 중에 이태왕 전하(고종)를 ‘태황제폐하(太皇帝陛 下)’라 칭하는 등 민족 자존의 정신을 표출하였다. 4) 가평군 북면에서는 3월 15~16일 양일간에 정흥교(鄭興敎·興龍)·정성교(鄭聖敎)·장기영(張基 榮)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상순에 ‘음력 2월 14일 아침 9시 가평에 집합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라!’는 「밀통(密通)」을 이윤석(李胤錫)이 2통, 정흥교가 1통씩 작성하였다. 이윤석은 목동·소법·화악리에 1통씩을 교부하고 이곡리에 직접 말로 전하 고, 정흥교는 정성교·이영헌(李英憲) 등에게 권유하였다. 면민들은 성황당을 거쳐 면사무 소에 800명쯤 집합하였다. 군중들은 ‘많은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면 독립되는 것’(정재명), ‘독립만세를 부르면 조선이 독립될 것’(정흥교·홍종선), ‘조선이 이제부터 독립한다’(장호 리(張浩利))고 인식하였다. 이윤석·정흥교 주도로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읍내로 향하 였다. 군수와 헌병 소장의 제지를 받으면서도 독립만세를 정당한 일로 생각하였다. 정흥교 의 신호에 따라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군청·면사무소·헌병분견소·우편소·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