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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총 설 2) 인천부 3월 6일 이후 인천공립보통학교는 동맹 휴교를 단행하였다. 교직원과 경찰서는 전화로 동 태를 조사·훈계하는 등 협조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3학년 김명진(金明辰)은 통신 체계를 방해하고자 3월 8일 오후 9시경 학교에서 박철준(朴喆俊)에게 망을 보게 하고 2층 전화선을 절단하고 사무실 수화기를 파손하였다. 내리에서는 4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간 김삼수(金三壽)·임갑득(林甲得) 등 주도로 독립 운동으로 폐점(閉店) 운동을 전개하였다. 인천에서는 3월 30~31일 일부 상점이 폐점하였으 나 일경의 설유로 개점하였다. 이들은 폐점자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4월 1일에 ‘인천 의 체면상 점포를 닫지 않으면 최후 수단을 취하겠다’는 협박문 18통을 오후 8시 이후 주명 서(朱明瑞)·이복현(李福鉉) 등을 통해 15개 점포에 투입하였다. 이튿날에도 계속 개점하자, “인천에 있는 상업가가 폐점하지 않으면 인천 시가는 초토화할 것이다”는 경고 20통을 장지 섭(張智燮) 등의 점포에 투입하였다. 이어 4월 3일에는 “속히 폐점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 을 취할 것이다”는 최후통첩을 배포하려다가 체포당했다. 3) 양주군 미금에서는 3월 13~14일 양일간 이승익(李昇翼)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3월 13일에 주민에게 총독 고유(告諭)를 읽어주고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이튿날 오후 1시 무렵에 이승익·정기섭(丁基燮) 등은 평내리 밖 주막에서 주민과 독 립만세를 부르고 면내를 순회하였다. 금곡리로 가는 도중에 헌병 비전임길(飛田林吉)의 해산 명령에 주민들은 “2천만 동포가 조선 독립을 기뻐하여 만세를 부름은 당연하지 않느 냐?”, 특히 이석준(李錫俊)은 “조선독립만세를 부름은 당연하지 않느냐?”며 독립만세의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와부에서는 3월 14일 이정성(李正成) 등이 협의하고 이튿날 이른 아침 송촌리와 부근 주민 들 10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 조안리와 부 근 주민들이 합류하여 덕소리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백석에서는 3월 27일 김대현(金大鉉) 등이 연곡리 주민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안 종태(安鍾泰·鍾台)가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고 연설을 하고 이튿날 약 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