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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어디 있겠느냐! 제군은 적수무지(赤手無智)함을 염려하지 말라!…분발하라! 분발은 사는 길 이다”, 제4호에 “우리 동포 형제여! 자신과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중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누구냐!…각자 분발하라. 건국 4252년”을 게재하였다. 「동포여 일어서라!」는 박노영(朴老英)이 3월 6일 김세룡(金世龍)과 격문을 발행하여 조선 독립운동을 격렬히 하자는 협의하였다. 3월 7일 전준희(全俊禧)는 한위건 원고를 김세룡 방 에서 박노영 등에게 교부하였다. “3월 1일 우리들 선배 33명은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 는데…동포여! 오늘날은 평화적 정도가 오는 시대이다. 민족적 자결이 일어나는 시대이다”, “동포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분기하라”는 ‘조선독립단’ 명의로 3월 7일 밤중부터 8일 오전 1시까지 약 800매를 인쇄하였다. 「경고」·「조선국민학생단발동」·「비법행동」은 이병주 주도로 제작되었다. 그는 3월 4일 최 강윤(崔康潤) 등과 「경고」 약 400매를 인쇄하여 최강윤이 수송·송현동 약 20매, 김종현(金 宗鉉)이 중학동 약 100매, 채순병(蔡順秉)이 소격동에 약간을 배포하였다. 이어 3월 5일 독 립만세를 부른 후 이필주 집에서 “5일 오전 9시 남대문 정거장에서 수만의 남녀 학생이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며…경성내 남녀 소·중등학교 학생은 조선독립의 희생이 되었다. 조선독립 만세! 건국 4252년 3월 일. 조선학생대표”의 「조선국민학생단발동」, “국민의 항상 지녀야 할 독립사상과 천연의 조국 정신을 가진 남녀 학생을 체포하는 자는 누군가?…우리들도 천부의 양심에서 스스로 울어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선량한 학생에게 폭행을 가하는 관리를 하늘 이 어찌 벌하지 않느냐? 조선건국 4252년 3월 일”의 「비법행동」 원고 2매로 이묘묵(李卯默) 과 수백 매를 인쇄하였다. 이병주는 정동에서, 이묘묵은 시내에 배포하였다. 「경고문」은 강일영(姜日永) 등이 3월 27~8일경 “우리들은 이때를 틈타 상해 재류동포와 책응하여 시위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를 약 100매 인쇄하고, 이튿날 강일영은 황금정, 김용희(金用熙)는 내자동, 김영식(金英植)은 시내에 배포하였다. 「반도의 목탁」은 장용하(張龍河)·이춘봉(李春鳳)·서정기(徐廷基) 등이 발행하였다. 이들 은 4월 1일 제1호 약 100매와 4월 12일 제2호 약 100매를 만들었다. 이춘봉·염형우(廉亨雨) 등 6명이 4월 13일 「8면에서 관찰한 조선의 참상」에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이래로 조선 민 족은 일본인 때문에 여러 방면에서 압박을 당하고 있다”는 1부 8매씩 20부, 이춘봉·염형우 등 5명이 4월 22일 제3호 “조선은 조선인의 조선이다. 조선인은 이의 독립을 힘쓰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