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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총 설 다퉜다. 박진갑은 30명 가량과 동대문행 전차에 돌을 던졌다. 유인수(兪仁洙·仁承)·이한 준(李漢準)·김찬희(金瓚熙)·이종엽(李鍾燁)은 서대문 1정목 부근에서 300여명 군중과 2집 단으로 나뉘어 만세를 부르며 전차에 투석하여 4~5대를 정지시키고 유리창을 부쉈다. 유인 수는 광화문통에서 5~60명과 만세를 부르고 2~30명에게 “돌을 던져라, 던져라”며 전차에 투석하였다. 또 광화문통파출소 부근에서 전차에서 부인이 떨어져도 차장이 운행하자, 군중 들은 격렬히 투석하고 기마순사 말을 맞췄다. 이한준도 운전수를 괘씸하게 여겨 30명 가량과 유리창에 돌을 던졌다. 김찬희는 7~80명과 만세를 부르고 2~30명쯤과 전차에 투석하였다. 이종엽은 당주동 입구에서 하수구에 빠져서도 독립만세를 불렀다. 박귀돌(朴貴乭)은 오후 8 시 반경 약 50명을 이끌고 종교파출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투석하였다. 그가 순사 보 박재봉(朴在鳳)에게 “밖에 나와 만세를 부르라. 만약 부르지 않으면 죽인다”고 하였다. 3월 27일에도 시내 여러 곳에서 야간에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우명철(禹命哲)은 오 후 7시 30분 약 50명과 동양협회 신축장 뒤쪽 언덕, 김종옥(金鍾玉)은 광화문 경찰관 연습 소, 박계갑(朴桂甲)은 태극기를 흔들며 등불을 들고 이효선(李孝善)·김은호(金殷鎬) 등 약 100명과 재동파출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유창덕(劉昌德)은 오후 9시 30분 광화 문에서 약 10명과 서대문에서 종로행 전차에 투석하였다. 윤희용(尹喜用)·김윤식(金允植) 은 공업전문학교 앞길에서 학교가 조선총독부 건물로 보기가 징그러워 자갈을 투석하여 유 리를 깨뜨렸다. 이봉하(李鳳夏)는 종로 네거리에서 혼자 국장을 슬퍼하며 나라 독립을 위해 울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박범룡(朴範龍)·최도학(崔道學)은 관훈동에서 소림(小林) 이 전선에 달린 태극기를 떼려는 순사에게 장대를 빌려 준 것을 분개하여 소림 집에 투석하 여 유리창·전등·식기류 등을 파손시켰다. 3월 30일에는 박홍기(朴泓基)가 종로 장사동 입구에서 큰 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만세를 권유하였다. ③ 3월 이후 : 4월 1일에는 강봉석(姜鳳錫)이 오후 2시경 황금정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박창룡(朴昌龍)은 낙타산(駱駝山) 산길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23일에는 3월 1일, 3월 5일 이후 최대의 독립운동인 국민대회가 있었다. 한남수(韓南 洙)·김사국(金思國)·홍면희(洪冕禧)·이규갑(李奎甲) 등은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각계 독 립운동자로 가정부를 수립하여 계통적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3월 중순 이후 대표자를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