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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통에서 아현고개로 만세 행진을 전개하였다. 엄창근(嚴昌根)이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신형균(申衡均)이 프랑스영사관 등에서 ‘조선 독립을 꾀함은 바로 이때이다. 각자는 이를 위 하여 몸과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라’ 연설을 하고, 염수완(廉壽完)은 “가게를 닫으라! 빨리 만세를 부르라!”하여 문을 닫고 만세를 불렀고 설규성(薛奎成)·김공로(金公璐 )·신화순(申 化順)·박효석(朴孝錫)도 동참하였다. 조덕인(趙德仁)은 죽첨정에서, 안흥성(安興成)·변장 성(邊長城)·김덕봉(金德奉) 등은 금화산 꼭대기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23일에는 종로통 일대를 중심으로 5~60, 100명, 2~300명씩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종로 3정목·5정목·동대문통 재교·동묘·동대문·돈화문통 나무시 장·숭정보통학교·연건동·숭이동·수은동·훈련원·광희정 석교·안암동 안암천 부근에 서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10~30명씩 군중들은 전차를 공격하였다. 종로통 재 교에서 이규민(李圭敏), 종로 1정목에서 유성옥(柳成玉), 수표교 입구에서 백창길(白昌吉)· 신명국(申明國), 종로 3정목에서 이천봉(李千奉), 광화문과 종로 사이에서 김사철(金四哲)· 원병준(元炳埈)·김복동(金福同), 공업전습소 입구에서 정필모(鄭必謨) 등이 군중과 전차에 투석하였다. 그 결과 제71·77·90·101·112·122·123호의 유리창·덧문 등이 파손되었 고 10여대 전차가 정차되었다. 3월 24일에는 김수근(金壽根)·안중식(安重植)·박지양(朴至陽)·허진(許榛) 등이 돈화문 통 및 그 부근 도로에서 수십명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5일에는 양주흡(梁周洽)이 경복궁 부근에서 모인 약 25명과 중학동에서, 조장록(趙 長錄)이 3월 25~6일 수십 명과 팔판·삼청동에서 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26일에는 시내 각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전차를 공격하였다. 서계동 노상에서 임 춘식(林春植), 중림동 공지에서 박효석(朴孝錫), 광화문통 기념비 부근에서 김교승(金敎承), 명월관에서 김규정(金奎正)·정만성(鄭萬成), 누하동 신명학교 마당에서 박순장(朴淳璋)· 김진영(金鎭永), 적선동에서 박흥준(朴興俊), 종교파출소 부근에서 장석영(張錫永), 안국동 에서 박학준(朴韓俊), 무교정에서 박진갑(朴辰甲), 서대문 1정목 부근에서 김동익(金東益)· 송병철(宋秉喆) 등이 5~100명의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박학준은 30명 가량과 만세를 부르고 양준식(梁俊植) 집에서 순사보에게 “만세를 부르는 자를 체포하는 순사보· 헌병 보조원 집은 불 태워 버린다”고 소리치고, 일본인이나 관리에게 음식을 파는 양준식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