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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Ⅰ ) 제국정부·귀중 양의원에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는 2월 26일 최남선에게 언문체 의견서 및 독립선언서 초안을 받아 의견서는 가다가나를 혼용한 일문(日文)으로 번역하고 독립선언서 는 일문으로 주를 달았다. 2월 27일에 33명 기명날인한 지면 3매를 받아 오후 8시 출발하여 3월 1일에 도쿄 상마애장(相馬愛藏) 집에 투숙하였다. 3월 3일 번역 의견서와 주를 달은 선 언서 각 3통을 정서하여 ‘통고문’으로 의견서와 연명자 기명날인한 지면을 첨부하여 내각· 귀중 양의원에 우송하였다. 안세환은 이승훈 등을 만나 기독교측 대표자로 선정되어 2월 27일 오전 8시에 출발하여 3월 1일 도쿄 용명관에 투숙하였다. 3월 4일에 경시청 총감에게 조선독립 이유를 누차 진 술하였다. 김지환은 2월 22~24일 무렵에 오화영·이승훈의 권유로 강화회의 열국위원 의견서·미 국 대통령 청원서 초안과 독립선언서를 안뚱현 목사 김병농을 통해 상하이 현순에게 우송하 는 것을 맡았다. 2월 28일에 서류를 함태영에게 받아 3월 1일에 신의주를 거쳐 안뚱현에 갔 으나 김병농이 의주에 있어 아들 김태규(金泰圭)에게 교부하였다. 5) 3·1운동 전개 ① 3월 초순 : 3월 2일 고희준이 3월 1일에 이어 오전 11시에 약 50명 군중과 종각 부근에 서, 김영진(金永鎭)도 보신각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5일에는 남대문에서 종로에 걸쳐 학생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 간부들은 제2회 독립운동을 3월 5일로 결정하였다. 한위건· 강기덕·김원벽 등이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및 기타 학교 대표자를 3월 4일 오전에 배재고등 보통학교 기숙사로 불러 ‘명 3월 5일 오전 9시에 남대문 역전을 집합지로 학생 주도의 독립 만세운동을 하고, 강기덕·김원벽이 지휘를 담당하니 각자는 각 학교 학생 또는 잘 아는 사 람을 규합하여 참가하라’는 뜻을 전하였다. 밤에는 한위건·강기덕·한창환·장기욱·전옥 결 등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구내에서 결속을 다졌다. 3월 5일 오전 8시 전후 남대 문 역전에 수만의 군중이 모였다. 강기덕·김원벽이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기’를 휘날리 며 달려와 제2회 시위운동을 선포하고, 이들의 지휘에 따라 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 며 남대문으로 향하였다. 일부 인사는 독립운동자 표시로 적포(赤布)를 다수 살포하며 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