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page

19 총 설 을 수시로 알려 학생들을 결속시켰다. 강기덕 등은 전문학교의 대표 인물을 조직화하는 것 이 초미의 급선무라 생각하고 각자 지기(知己)나 그 중개로 경성전수학교 전성득(全性得)· 윤자영,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한위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김문진·이용설(李 容卨), 경성공업전문학교 김대우(金大羽),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강기덕·한창환, 연희전문 학교 김원벽 등을 대표자로 2월 20일 승동예배당에서 제1회 간부회를 개최하였다. 회의에 서 전성득·김형기·김문진·김대우·강기덕·김원벽은 대표로 책임을 지고, 이용설·한위 건·윤자영·한창환은 학교 대표자가 체포될 경우 뒷일을 처리하며, 동창생 규합을 담당하 기로 하였다. 이후 김원벽·이용설·김문진·김대우·김형기·한위건·주익 등은 학생들도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원벽은 2월 23일 박희도에게 손병희 등의 독립선언서 발표에 ‘한 구역인 경성에서 2개의 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학생단의 선언서 발표를 중지하라’는 말을 듣고 강기덕 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승동예배당에서 한위건·김형기·김대우·김성득·김문진·김원벽 등과 만나 한위건의 제안으로 천도교도·예수교도의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행동할 것과 학 교 대표로 학생들의 참가 권유를 지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 3월 초순 독립선언과 만세운 동 결정이 학생측에 통고되었다. 각 대표자 및 한위건·한창환·윤자영 등은 2월 25일 이필 주 집에 모여 3월 1일 전문학교 및 중등 정도 학생이 모두 정각에 파고다공원에 집합하여 독 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상황에 따라 계속 각 전문학교를 중심으로 일대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튿날 다시 이필주 집에서 김문진·이용설·윤자영·김탁원(金鐸遠)·최경하 (崔景河)·나창헌(羅昌憲)·박윤하(朴潤夏)·김영조(金榮洮 ) 등 학생들은 제2회 독립운동에 분발하여 학생을 규합하고 참가할 것, 제1·2회 독립운동에 관헌에 체포되지 않은 자는 뜻을 굽히지 말고 더욱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최후 목적을 완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2월 27일에도 정동예배당에서 김원벽·강기덕·한위건 등이 모였다. 강기덕은 2월 28일 오후 2시경 세브란스병원에서 이갑성에게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 원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시내에 중등 정도 학생들이 선언서를 배포하도록 김문진에게 의뢰하여 두었으니 선언서 배포를 지원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이를 한위건에게 전 하여 중등 정도 학생을 모이도록 하였다. 밤에 김문진이 이갑성에게 선언서 1,500매를 받아 승동예배당으로 가져왔다. 승동예배당에 전문학교 대표자 김문진·김형기·한창환·이용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