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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97 세 시위운동이 일어나서 송우리 주민 6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 였다. 헌병대가 출동하여 주모자 1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주민 체포에 거세게 항의하였고, 일본 헌병들은 칼을 빼어 마구 휘두르면서 주민들을 해산시 켰다. 이때 부상자들이 생겼다. 영평에서는 1,000명의 주민들이 모여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유리창을 파괴 하였다. 또한 친일 면장을 구타한 뒤 영평헌병분견소永平憲兵分遣所로 몰려가 압 박하다 해산하였다. 이후 3월 29일 소흘면 무봉리 茂峰里에서는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날 군내면郡內面 주민 200여 명도 유교리 柳橋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신북면의 각 구 장들인 삼성당리 서성달徐成達 , 심곡리의 이치상李致相, 고일리의 성성문成聖文은 심곡리의 윤충렬 尹忠烈등과 비밀리에 모여 서울의 천도교 본부로 사람을 보내 연락을 주고받았다. 3월 29일 밤 동리에 “3월 30일 신북면사무소 부근에 집합하 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라”는 통문이 나돌았다. 통문을 받은 동민들은 이 통문 을 다른 이웃들에게로 돌렸다. 이렇게 하며 밤을 타서 다음날의 만세시위 계획 이 면민들에게 알려졌다. 예정한 3월 30일 오전 11시 3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들었다. 주도자 윤 충렬이 기수가 되어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대는 면내를 향해 독립만세를 부르 며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일행은 면내로 가는 중간 지점인 가채리 앞 들판에 서 일본 기마병과 맞부딪혔다. 일제 헌병경찰은 군중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 여 3명의 시위 운동자가 현장에서 순국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3명 의 주동자가 피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