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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서 처음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이후 잠잠하다가 3월 26일부터 30일까지 사이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3월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는 구세군 교인인 임명애林明愛가 주 도하여 100여 명의 학생들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이후 3월 25일 임명애와 염규호 廉圭浩 부부는 학생 김수덕金守德, 농민 김선명 金善明· 김창실 金昌實 등과 자신의 집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이때 염규호가 작성하 여 등사한 격문 60매를 김창실이 와석면 구당리·당하리 등지에 배포하였다. 3월 26일 임진면 문산리에서 농민 5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이기남 이 피격되어 사망했다. 또 이날 주내면에서는 파주리 장날이었다. 파주리와 인 근 주민 500여 명은 곤봉으로 무장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일제 헌병이 주도자를 체포하려 하자 시위대원들이 달려들어 일제 헌병에 타격 을 가하고 보호하여 체포를 저지시켰다. 일제 헌병은 세부득하여 개성헌병대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날 밤에는 청석면내 높은 봉우리 일제히 봉화가 오르며 독립만세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3월 27일에도 청석면 심학산에 많은 군중이 흰 옷을 입고 집결하여 온 산 임명애 수형기록(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염규호 수형기록(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