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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89 둘째 날은 장암리長巖里에서 천도교인 250여 명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벌였 다. 시위대가 장암리에서 오천리까지 행진하는 과정에서 새로 합류한 사람들이 있어 시위대 규모는 350명 가량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오천리에 있는 일본 헌 병주재소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 헌병주재소 헌병은 일본군 보병의 지원을 받아 공포를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시위 군중은 이에 맞서 투석을 하면 서 더욱 격렬하게 일본군에 저항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장총에 착검을 하고 시 위대를 향해 총검을 휘둘렀다. 시위대원 20여 명이 총검에 찔려 자상刺傷을 입었 으며 2명이 체포되었다. 4월 1일에는 전날의 일본군 만행에 분개하여 신둔면·마장면·백사면·모 가면·대월면·호법면·읍내면의 7개면 연합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31일 신둔면 수하리 水下里 김명규金明奎 집에서 같은 마을의 서기창徐基彰·이상혁李商 爀 ·김영익金永益 , 모가면의 권중효 權重孝 , 백사면의 김순철金順哲 목사 등이 모여 대응책을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시위일자가 4월 2일로 결정되었다. 신둔면에서는 일본 군경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 당초 계획보다 하루 앞당겨 4월 1일에 일어났다. 이날 수광리 水廣里 의 면사무소 앞에 5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여들었다. 이상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며, 서기창의 선창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면내로 행진해 나아갔다. 시위대가 지나가는 연도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가세하여 숫자가 더욱 늘어갔다. 이천 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총칼을 앞세워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4월 2일 마장면 덕평리 德坪里를 비롯하여 모가면·백사면·읍내면·대월 면·호법면 등 6개 면에서 당초 계획한 대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마장면 덕평 리에서는 4월 2일 밤 3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일본군의 발포로 10여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