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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이들의 총기를 탈취하는 등 적극 저항하였고,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향하여 발 포하여 1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를 내고 1명이 체포당했다. 3월 29일에는 별내면別內面 퇴계원리 退溪院里 에서도 200여 명이 시위를 벌여 5명이 체포되었다. 같은 날 진접면에서 400여 명이 시위하자 일본헌병이 발포하 여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였으며 1명이 체포되었다. 역시 같은 날 구리 면 아천리의 아차산 峨嵯山 꼭대기까지 올라가 태극기를 들고 만세 시위를 벌였 다. 진건면 眞乾面 오남리梧南里에서도 나상규羅相奎 ·손삼남孫三南 등이 주동하여 수십 명의 이민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둔면 柴屯面 자일리自逸里에서 목수 인 조염호 趙念鎬가 30여 명의 이민과 함께 시위를 벌였고 부근의 동리에서도 봉 화를 올리며 가세하였다. 3월 29일 봉선사 서기실에서 약 200매 정도 유인물을 인쇄하여 승려 강완 수 등 2명이 그날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부평리·진벌리 등 부근 4개 동 리 민가에 배포하였다. 그에 앞서 진접면 봉선사奉先寺의 승려인 이순재李淳載· 김성숙 金星淑(이명 성암)은 서울 종로에서 약종상을 하는 김석로金錫魯로부터 경성 에서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평리 부근의 주민들을 모아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독립만세 시위를 할 것과 이에 동참을 촉구하는 문건을 제작·배포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조선 독립단 임시사무소’라는 명의로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운동을 하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 는 내용의 문건을 만들었다. 3월 30일 주내면 州內面에서도 6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를 공 격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31일 진접면 부평리 이재일·김순만 등의 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