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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67 순사부장 열전실熱田實과 순사 장촌청삼랑長村淸三郎 이 차인범車仁範 등 34명을 구 속하고,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에 송치되었다. 이러한 탄압 결과 일제측이 밝힌 우정·장안면의 피해상황은 그들 보고서에 따르더라도 다 음과 같다. 수원지역 58개 마을, 328채의 가옥 소실, 47명 사망, 17명 부상, 442 명 체포 등이다. 시흥 오늘날 서울시에 편입된 북면 (영등포리·당산리·노량진리·양평리·구로리·신길리)과 신동면 (잠실리·양재리)을 비롯하여 서이면·수암면·남면·서면·과천면·군 자면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박은식은 집회횟수 6회, 집회인수 1,950명이라 집계 했다. 이지원은 모두 23회의 시위가 발생했다고 했다. 3월 7일, 23일(6회), 25일, 26일, 28일 (2회) , 29일(7회), 30일(2회), 31일(2회), 그리고 4월 3일이다. 3월 27일 밤 8시 서이면 일동리 서쪽 언덕에서 일동리 주민들이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는 비산리 사는 포목 행상 이영래가 일동리 백기화의 집에 들 러 이종교 등 여러 사람들에게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설득한 데 따른 일이었다. 같은 날인 27일 밤 이정석 李貞石이 서면 노온사리老溫寺里의 주재소 근처에 서 노온사리 주민들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 구금되었다. 이튿날 그의 아버지 이종원 李宗遠이 동리 사람들에게 아들의 구금 사실을 호소했다. 이에 동 리민 약 백 명이 모였다.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최호천과 윤의병이 더 많은 사람들을 규합하자고 제의하여 일동은 가리대리로 가서 각 집을 찾아 불 러내어 100여 명이 더 합세하였다. 이날(28일) 밤 10시경 그 동리 경찰관주재소 를 포위하고 수백 명이 모여 이정석의 석방을 위해 노온사리 주재소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