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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경기도 지역 3·1운동의 전개 59 (현재의 강서·양천구 등)과 인천(검단)으로 편입되었다. 박은식에 따르면, 김포에 서는 13회 집회가 열렸고, 1만 5천명이 집회에 참여했다. 또 이지원은 모두 7회 의 시위가 열렸다고 집계했다. 날짜별로는 3월 22일(2회), 23일(3회), 24일과 26 일 각 1회이다. 3월 19일 양촌면 누산리 박충서는 향리의 동기들과 함께 안성환의 집에 모 여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격문과 통문을 만들어 양촌면 내 각 마을에 배포하였다. 3월 22일 월곶면 군하리 장터에서 4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이살 눔이 태극기를 휘두르고, 박용희 朴容羲 가 군중을 지휘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 사무소·주재소와 보통학교 등을 돌면서 시가행진을 했다. 성태영은 면사무소 앞 높은 곳에 올라가 군중들에게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을 규탄하는 연 설을 하였다. 이에 군하경찰관 주재소 산전중양山田重洋 순사가 성태영을 제지하 자 백일환이 순사에게 달려들어 총과 칼을 빼앗고 순사를 구타하였으며, 일동 이 순사주재소로 쇄도해갔다. 백일환 등은 군중과 함께 순사보 이성은을 끌어 내어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하고 면사무소로 가서 면서기들에게 태극기를 쥐어 주면서 만세 삼창을 하도록 요구했다. 이에 앞서 김포군 월곶면 고양리 사는 성 태영 成泰永과 군하리 백일환 白日煥은 고정리에 사는 최우석 崔禹錫은 3월 22일 월 곶면 군하리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이들이 장터의 군중들에게 “조 선의 독립을 원하는 자는 향교 앞으로 모이라”고 하였는데, 이 시위는 거기에 호 응한 것이었다. 같은 날인 3월 22일 대곶면 초원지리에서는 정인섭 丁寅燮이 먹으로 쓴 “독 립만세”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동리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장꾼들이 모여 들어 300여 명의 시위대가 형성되어 주재소와 면사무도 등지로 나아가며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