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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한권으로 읽는 경기도의 3·1운동 광주 일제강점기 광주군은 이후 관할 구역 가운데 일부가 서울시(현재의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등) 로 편입되고, 또 다른 일부는 각각 성남시와 하남시로 분리 독립되었다. 박은식에 따르면, 광주군에서는 21회의 집회횟수와 7,500명의 집회인수를 기록 했다. 이지원은 모두 9회의 시위가 있었다고 집계했다. 3월 26일(3회), 27일(5회), 28일 (1회) 등이다. 이 시기 광주군의 시위를 보자. 먼저 3월 21일 서울과 가까운 중대면中垈面 송파에서 장덕균 張德均·김현준金賢俊은 《조선독립신문》과 독립선언문을 50부씩 등사한 후 송파리 주민에게 배부하여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는데, 그들은 서울에 서 《독립신문》과 그외 여러 가지 독립운동 관계 인쇄물을 각 지방에 반포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어 3월 26일 중대면 송파에서 천중선 千仲善 등이 주민 수백 명과 함께 만 세 시위운동을 벌여 헌병파견소까지 가서 일제헌병과 한때 대치하는 등 열렬히 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같은 날 중대면 송파리와 대왕면 수서리에서 열린 만세 시위는 돌마면 突馬面 여수리麗水里의 이시종李時鍾 과 대왕면大旺面 수서리水西里의 이재순 李載淳이 주도했다. 3월 26일 동부면東部面 풍산리豊山里의 김홍렬金弘烈은 풍산리에서 시위를 주 도했다. 또 같은 날 같은 면인 동부면에서는 교산리 校山里에 거주하는 이대헌李大 憲 이 이곳 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 1매를 만들고, 다음날(27일) 오전 2시에 동리 사람 10여 명을 인솔하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뒷산에 올라가 약 1시간 동안 봉화 를 올리며 만세시위를 하였다. 오전 3시경 산에서 내려와 약 30분 동안 동부면 사무소로 시위 행진하였다. 오전 11시경 다시 동민 30여 명과 함께 면사무소로 시위 행진하여 약 3시간 동안 만세시위를 하였다.